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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눈물겹고 슬기롭게 25년 전 캐나다로 이민길을 떠나는 나에게 사람들은 ‘영문과 나왔으니 말 안 통해서 못할 일은 없겠네’라며 빈말 격려라도 했지만, 이국땅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영어의 한글 표기법과 현지의 실제 발음은 천양지차다. 예를 들면, 우유를 뜻하는 'milk'의 현지 발음은 '미역'에 가깝다. 정직하게 글자 그대로 '로또'라고 하면, 종일 기다려도 로또 한 장 사기 힘들다. ‘라로’라고 해야 금방 알아차린다. 캐나다의 수도는 ‘토론토’Toronto가 아니라 ‘터로노’라 불린다는 걸 알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10여 년 동안 한국어 방송의 PD 노릇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동포들을 대상으로 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듣게 된, 은근한 감동과 쓴웃음을 준 에피소.. 2025. 10. 27.
신인류(新人類), 로이 G. 비브 ‘로이 G. 비브(Roy G. Biv)’는 무지개를 구성하는 7가지 색깔(Red, Orange, Yellow, Green, Blue, Indigo, Violet)의 첫 글자이고, 각 색은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니면서도 조화로운 전체, 즉 무지개를 이룬다. 이것은 다문화정책과 매우 흡사한 철학적 비유로 사용된다. 이제는 다문화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명사가 된 로이 G. 비브. 그는 다문화사회의 은유적 상징이며, 각기 다른 정체성이 서로를 지우지 않고도 함께 아름다울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각각의 색깔은 ‘문화’가 되고, 무지개는 ‘사회 전체’를 상징하고 있다. 빨강이 주황으로, 파랑이 보라로 ‘동화’되거나 ‘삭제’되면 그건 무지개가 없는 단색의 하늘이 되어버린다. 다문화정책은 바로 그런 원리.. 2025. 10. 22.
슬픈 개그 요즘 많은 사람들은 코미디란 말보다 개그란 단어를 더 친숙하게 여기는 것 같다. 나는 개그라는 말만 들어도 재미를 느낀다. 그 계산된 시퀀스에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기 때문이다. 가끔 세련되지 못한 '몸 개그'를 볼 때면(슬랩스틱 코미디도 훌륭한 장르이긴 하지만)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그 슬픔이 깊어지면 때로는 노여움으로 변한다. 이제 정치판의 개그 소재는 누구나 쉽게 찾아낼 정도로 식상해졌다. 하지만 신성장 동력으로 기대되는 문화콘텐츠를 생산하는 문화판을 생각하면 괜히 안타까워진다. 오랫동안 나는 현장에서 이곳저곳을 다니며 ‘슬픈 개그’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슬픈 개그는 무지(無知)에서 생긴다. 만용(蠻勇)으로 커간다. 기억나시는지, ‘기본을 알아야 한다’고 외쳐댄 과자CF에 머쓱했던 순간을. .. 2025. 10. 19.
‘오늘부터 O형(型)입니다’ 부끄러운 고백이 될 지도 모르겠다. 나는 중학 2학년 때부터 한 20년 동안 나의 혈액형이 A형인 줄 알았다. 수혈이 필요한 큰 사고가 없었으니 망정이지, ‘어쩔 뻔했었냐’는 야단도 많이 맞았다. ‘혈액형으로 보는 오늘의 운세’도 A형으로 찾아보았고, 대중잡지에 늘 실리는, ‘성격을 맞춰보는 코너’도 늘 A형으로 대입시켜 찾았었다. 혈액형이란 평생 변하지 않는 선천적인 유전정보여서 언제나 엄청나게 중요한 정보였지만, 나는 그저 그런 정보쯤으로 알고, 배려심 많고 예의 바르다는 장점과, 걱정 많고 소심하며, 변화에 약하다는 단점을 가진, 맞춤형 ‘A형 인간’으로 크게 엉기지 않고 그냥 살았다. 30년 전 쯤으로 기억되는 직장신체검사일. 대형병원에서 온 검진차량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문진과 채혈을 시작.. 2025. 6. 30.
사회적 가난 2016년 칸(Cannes)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켄 로치 감독)의 몇몇 장면을 기억한다.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 영감이 남기는 마지막 편지의 문구는 내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이 영화는 컴퓨터 앞에 앉아 화면에 뜬 서류 내용을 채워 넣지 못하면 복지 혜택을 받을 수도, 자신이 받은 부당한 처분에 항의할 수도 없는 사회의 일상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오늘날 전 세계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로 꼽히는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 : 디지털 격차)를 서늘하게 묘사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 중의 하나다. "자존감을 잃으면 끝장이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이 말 또한, 직접적으.. 2025. 5. 5.
죽지는 않는 병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는 없더라도, 요즘 어디 아픈 데는 없으신지? 디지털 시대를 모질게 관통하는 사람들 여럿에게 물어본다. 그들이 호소하는 대표적인 질환은 근시, 눈피로, 안구건조증, 거북목 증후군, 손목터널 증후군, 손가락 건초염, 수면 장애, 주의력 결핍 및 집중력 저하, 우울증 및 불안 장애 따위이다. 모두 디지털 중독(Digital Addiction)이 원인이라고들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디지털의 긴 터널 속에 갇혀있는 우리는 ‘병 같지 않은 병’을 더 많이 앓고 있다. 이름하여, 필터 버블(Filter Bubble), 에코 챔버(Echo Chamber), 그리고 팝콘 브레인(Popcorn Brain)이 바로 그것이다. 이 생소한 이름의 세 가지 질환은 알게 모르게 우리한테 매우 깊.. 2025. 5. 2.
전통문화 사랑으로 단짝을 이루다. 수오당(羞烏堂) 뿌리깊은나무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단소와 거문고명인 백경 김무규(1908-1994) 선생의 고택 수오당(羞烏堂)과 부속건물 여덟 채 가 있다. 모두 선생의 고향인 전남 구례 절골마을에 있던 생가 건 물을 옮긴 것이다. 수오당은 한낱 미물인 까마귀의 효행을 보고 '까마귀 보기에도 부끄럽다'는 의미의 당호다. 1980년 한창기는 이 고택을 보고 한순간에 매료되었는데 그로부 터 26년 후인 2006년 뿌리깊은나무재단에서 매입해 이곳으로 이건했다. 사랑채 누마루는 영화 에서 백결 선생의 거문고 연주 촬영지로 제공되기도 했다. 이 수오당의 누마루와 맞은편의 뿌리깊은나무 전시관은 두 사람의 전통문화사랑으로 오래전부터 한몸이었던 듯 조화를 이루며 방문자들을 맞고 있다. '박물관에서 무릎을 치다' 중 "우리 문화의 한 .. 2025. 4. 23.
어느 도시의 기록 누군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게 되고,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 같지 않을 거’라 했다. 이렇게 풀어보면 어떨까. ‘지난날을 기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다’고. 한 도시가 있다. 이 도시는 서기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대구(大丘)라는 이름을 얻었다. 올해로 1268년이 흘렀다. 전주, 남해 등과 같이 도시의 이름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1757년(영조 26년)에 유학자 이양채가 공자(孔子)의 아명이 공구(孔丘)라는 이유로, ’고을 읍‘부를 붙여 대구(大邱)라고 쓰자며, 피휘를 거듭 상소했다, 영조임금은 세 차례나 거부했고, 1779년(정조 3년)에는 둘 다 써도 괜찮다 했고, 1854년(철종 5년)이 되어서야 지금의 대구로 굳어졌.. 2025. 4. 21.
역사의 가치를 더해가는 두 이름의 도시, 후쿠오카(福岡) #4 문화도시 혹은 도시문화란 무엇인가. 문화란 ‘자연을 소재로 하여 목적의식을 지닌 인간의 활동으로 실현되는 과정’으로, 종교나 예술, 과학, 문학 등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도시를 문화적으로 재구성하려는 것‘이 문화도시의 개념이며, 목적은 도시 속에서 삶의 질 향상과 경제의 활성화에 있다. 현재 우리나라 도시들이 추진하는 문화도시는 지역의 문화정체성을 바탕으로 지역의 명소를 부각시켜 투자와 관광객을 유치하는 브랜드 중심의 기업형 도시전략으로서, 관(官)주도의 지역축제와 문화도시만들기 바람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관주도형 도시문화만들기는 막대한 국비를 지원하게 되면서 중앙정부로부터 예산을 지원받기 위한 목적으로 경쟁적으로 추진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지방자치단체장의 .. 2025. 4. 15.
역사의 가치를 더해가는 두 이름의 도시, 후쿠오카(福岡) #3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도시의 박물관은 시민의 문화복지에 절대적으로 기여한다. 함께 진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를 주제로 한 세계의 박물관들은 혁신적인 생각과 효과적인 접근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한층 애쓰고 있다. 누군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게 되고,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 같지 않을 거’라 했다. 이렇게 풀어보면 어떨까. ‘지난날을 기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다’라고. 도시박물관은 단순히 도시의 유물을 보존하는 곳이 아니다. 도시박물관은 도시가 성공적인 발전을 위해 방향을 제시하는 이야기꾼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블라즈 페르신, 류블라냐 도시박물관장・슬로베니아), 도시박물관은 도시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방식에 대해 해석하고 설명해야 할 필요가.. 2025.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