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도시의 박물관은 시민의 문화복지에 절대적으로 기여한다. 함께 진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를 주제로 한 세계의 박물관들은 혁신적인 생각과 효과적인 접근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한층 애쓰고 있다. 누군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게 되고,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 같지 않을 거’라 했다. 이렇게 풀어보면 어떨까. ‘지난날을 기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다’라고.
도시박물관은 단순히 도시의 유물을 보존하는 곳이 아니다. 도시박물관은 도시가 성공적인 발전을 위해 방향을 제시하는 이야기꾼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블라즈 페르신, 류블라냐 도시박물관장・슬로베니아), 도시박물관은 도시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방식에 대해 해석하고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맥스 헵디치, <도시에 대한 박물관>저자), 무엇보다도 도시박물관은 도시를 이해하는 곳이어야 한다. 많은 박물관들은 가까운 과거는 낯설게 다루고, 현재는 회피하며, 미래는 무시하는 박물관이었다. 또한, 지금도 그러하다(이안 존스, CAMOC 사무관・영국). 이들 전문가의 표현은 ‘박물관은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한 도시의 가치를 그 역사가 담긴 박물관 혼자서 오롯이 드러내 보이기란 쉽지 않겠지만, 후쿠오카시와 인근의 세 박물관이 보여주는 잠재가치는 부럽기 그지없다.
후쿠오카시의 도시매력 가꾸기는 문화재 정책에서 살필 수 있다. 후쿠오카시의 문화재 발굴 등과 관련된 예산은 연간 300억 규모. 인구 수는 일본에서 7~8위 정도이지만 문화재 예산만큼은 교토와 오사카에 이어 3위를 차지한다. 문화재의 수도 국가 지정 792점, 현(縣)지정 1천289점, 시 지정 2천665점 등으로 일본 도시 가운데 가장 많다. 그뿐 아니라 후쿠오카시는 1987년 말 헤이와다이(平和台) 야구장 야외 관람석 보수공사 중에 발견된 고로간(鴻臚館) 유적터의 복원작업을 지금도 계속 진행하고 있다.
여기서 후쿠오카의 잠재력을 느낄 수 있는 박물관을 만난다.
먼저, ‘후쿠오카 시립박물관’. 후쿠오카 시립박물관이 자랑하는 대표 유물은 고대중국역사서에 기술되어 있는 금인(金印)으로,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 새겨져 있으며, 한쪽 면이 2.3cm이다. 서기 57년 후한의 광무제로부터 하사 받은 것으로, 여러가지 추측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유물이라 더더욱 흥미롭다. 금인은 국제교류의 흐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대륙과의 접점으로, 서쪽의 서울(西の都)이라 불리며, 국제도시로 번영했던 하카타. 메이지정부가 탄생하고 박람회와 공진회 등의 개최로 근대도시화가 진행되었던 후쿠오카. 이곳을 대표하는 ‘후쿠오카 시립박물관’의 기본이념을 들여다본다. ‘향토의 역사를 올바르고 알기 쉽게 전시하며, 문화유산의 다목적 활용을 도모하고 시민과의 소통의 장이 될 것과 향토의 역사를 형성한 지리적·정치적·경제적인 여러 조건들을 종합적으로 자리매김하여 일본 내 후쿠오카를 올바르게 이해시켜 규슈의 주도(州都)에 걸맞은 박물관이 되어야 한다’. 이 정리된 생각은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보게되는 <후쿠오카 박물관의 활동방침>과 맞물려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모든 것이 결코 허언(虛言)이 아님을 알게 한다. 그 ‘활동방침’은 ‘❶ 2000년 이상 아시아와의 교류 역사를 가진 다른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후쿠오카의 특성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으며 올 때마다 감동과 발견을 할 수 있는 매력적인 전시, 교육 보급 활동을 한다. 동시에 아시아, 나아가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지적 체험의 장으로서 충실을 도모한다. ❷ 최신의 고도의 정보기능을 활용하여 어린이부터 일반시민, 전문가까지 다양한 관심에 대응할 수 있는 전시와 해설을 실현하고, 수장품의 데이터와 박물관 정보를 국내외에 널리 전파하여 문화자원으로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❸ 후쿠오카의 역사와 민속에 관한 둘도 없는 문화유산의 발견 수집에 힘쓰고, 조사연구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학술의 진전과 시민의 학습 의욕, 지적 욕구에 부응한다. 또한 문화유산의 적절한 보존, 계승과 활용에 필요한 선진적 기술과 설비를 보유한다. ❹ 시민의 역사문화, 민속연구활동 등과의 연계를 도모하여 시민에게 친숙한 교류의 장이 된다. 또, 학교나 지역과 제휴해, 어른과 아이가 함께 배우고 즐길 수 있는 박물관을 목표로 한다. ❺ 박물관의 쾌적한 환경보전과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시민의 휴식처이자 시민의 응접실이며, 자주 오고 싶어지는, 누군가를 데려오고 싶어지는 박물관을 목표로 한다. 나아가 아시아 교류거점도시 후쿠오카에 걸맞은 문화의 상징적 시설로서 더욱 높은 평가를 받도록 노력한다.’이다. 이건 레이 올든버그(Ray Oldenburg)가 이야기하는 ‘제3의 장소’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모지코(門司港)의 ‘간몬해협(関門海峽)박물관’. 이곳은 체험형 박물관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간몬해협은 일본 혼슈 서쪽 끝 항구인 시모노세키시(下関市)와 기타규슈시 모지구(門司区) 사이의 해협이다. 이 해협을 테마로 문을 연 간몬해협박물관은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역사의 큰 무대였던 간몬해협의 장대한 이야기를 엮어내는 체험형 박물관으로 모지코 레트로(retro)지구의 랜드마크이다. 원래의 이름은 생긴 모습을 따서 2003년 ‘해협드라마십(dramaship)’으로 문을 열었지만, 2018년부터 1년 반 동안 10억 엔의 예산을 투입, 리모델링을 하고 체험거리를 늘려 2019년 9월, 이름을 바꿔 재개관했다. 해협의 역사, 자연, 문화를 영상이나 게임을 통해 다양하고, 드라마틱하게 체감할 수 있는 시설로 탈바꿈한 것이다. 5층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은 요즘의 고층형 박물관들이 그렇듯이 올라가서 내려오며 관람하는 구조다. 2층에서 4층까지 뚫린 ‘해협 아트리움’은 해협의 역사를 환상적이고 역동적인 영상으로 재현해 특별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18m × 9m의 거대한 돛모양 스크린은 압도적인 영상미로 해협의 다양한 매력을 전한다. 빛과 음악이 어우러지는 바다생물들의 컬러풀한 판타지를 사실적인 그래픽으로, 국제무역항으로서 발전한 모지코의 변천을 역동적인 모노로그로, 1185년의 단노우라 전투와 1863년의 바칸 전쟁(馬関戰爭)을 최첨단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주는데, 나선형 슬로프를 오르는 관람객은 약 8분 길이의 영상을 30분 간격으로 관람할 수 있다.
‘해협역사회랑’(3층)에서는 혼슈(本州)와 규슈(九州)가 갈라졌다는 전설에서부터, 시대의 변화를 부른 수많은 사건들의 무대가 된 이곳의 이야기를 정교한 인형으로 재현하고 있다. 간몬해협에서 일어난 단노우라 전투, 바칸 전쟁 등도 재현되어 있는데, 어떻게 인형으로 그 장대한 역사의 드라마가 제대로 표현되겠냐고 반문한다면 그건 기우에 불과하다. 일본과 체코 등의 저명한 인형작가 10명이 화려하고 개성 넘치는 다양한 인형으로 해협의 역사와 풍경을 감동적으로 되살려냈기 때문이다.
1층은 1900년대 초반 다이쇼(大正)시대를 재현한 ‘해협레트로’ 거리로 꾸며져 있다. 다이쇼시대 국제무역으로 번성했던 모지코의 거리 일부를 실제 크기로 재현한 공간이다. 모지코가 바나나를 맨 처음 수입한 곳임을 알려주는 재미난 풍경과 전차(電車)가 있고 상인들이 흥정하는 거리의 모습을 사실적인 단색조의 조형물로 보여주고 있다. 방문객들은 항구도시 모지코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길목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 같다. 천장에 달린 수십 개의 조명이 연출하는 푸른 하늘과 노을 그리고 별이 쏟아지는 밤 풍경 속에 거리의 화가, 바나나장수, 영화관, 선술집 등이 지난날의 흥청거림을 느끼게 한다. 자연스레 지역의 역사를 알게 하는 전시기법이 돋보인다. 일본 각지에서 복고풍 경관이나 체험으로 경제효과를 올리게 되면서 유사한 시설들이 세워지고는 있지만, 그것도 실내에 이처럼 잘 만들어진 곳은 흔하지 않을 것 같다.
‘간몬해협박물관’은 다양한 방법으로 간몬해협의 매력을 알려 70만 명의 관광객을 모으는 데 제몫을 다하기 위해 욕심을 잔뜩 낸 공간이지만, 전혀 흠잡을 데가 없다. 오로지 ‘간몬해협’ 그 하나에 집중하고 있는 곳, 다양한 콘텐츠들을 ‘기-승-전-해협’으로 모아놓은 곳.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망라된 원소스멀티유즈(OSMU)의 교과서 같은 박물관을 나서면서 사람들은 모지코 레트로의 가치를 다시 기억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규슈국립박물관(九州國立博物館)’. 후쿠오카현 다자이후(太宰府)의 이 박물관은 ‘일본은 아시아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독자적 문화를 형성해 왔는가’를 콘셉트로 2005년에 개관한 일본 네 번째 국립박물관이다. 100년 만에 지어져 화제를 모은 일본 최대의 국립박물관으로 ‘바다의 길, 아시아의 길’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옛날부터 교류를 통해 번성했던 이곳과 잘 어울린다. ‘바다의 길, 아시아의 길’(海の道, アジアの路). 그리고 이 캐치프레이즈를 테마로 한 상설전시로 일본의 교류사를 드라마틱하게 체감할 수 있다. 도쿄(東京), 나라(奈良), 교토(京都)에 이은 4번째 국립박물관으로 ‘규슈의 100년 꿈’을 이룬 규슈국립박물관은 "일본문화 형성을 아시아 역사적 관점에서 조명한다'는 새로운 컨셉으로 일본과 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문화 교류의 역사를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1873년에 "다자이후 박람회"가 개최된 후 박물관을 건설할 계획이었으며, 일본 현대예술운동을 이끈 텐신 오카쿠라가 규슈에 국립박물관을 세워달라 요청한 1899년 이래로 박물관 건립은 이 지역의 소원이었다. 그 후, 106년이 지나고서야, 이 소원은 마침내 “아시아와의 문화적 교류를 위한 토대”로 2005년에 문을 열었다.
규슈박물관의 기본 개념은 “아시아 역사의 견지에서 일본문화 형성을 검토해 보는 것”으로, 나름의 독특함이 존재한다. 또한 수도나 과거에 수도였던 지역이 아닌 지방의 도시에 건립된 최초의 박물관이라는 것도 매우 두드러진 일이며, 후쿠오카 주변의 문화는 아시아의 문화 및 개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다양하게 알려줄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양한 문화가 아시아 각국으로부터 교류를 통해 일본으로 전해져 왔고, 이 중에서 어떤 것들은 일본인의 지혜와 일본의 문물로 심화 발전된 다음 다시 그 지역에 되돌려졌다. 후쿠오카는 항상 이러한 교류의 토대이자, 중심이었다. 이런 면에서, 후쿠오카 자체가 역사에서 비롯된 국제적 문화교류도시임을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규슈국립박물관은 후쿠오카 인근의 유명 관광지 다자이후 텐만구(太宰府天満宮)에서 무빙워크로 층층이 연결되어 접근성이 좋다. 에메랄드빛 외관이 돋보이는 박물관을 들어서면 1층에 아시아 문화의 체험형 전시공간 ‘아짓파’(あじっぱ)가 자리하고 있다. 여행을 모험과 순례로 나눠본다면, ‘아짓파’는 순례에 더 가까운 여행일 것이다. ‘가깝고도 먼’ 아시아의 나라들을 찬찬히 경험해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방문한 아이들에게는 경이로운 여행이 아닐 수 없다. 'アジアのはらっぱ'(아시아의 들판)의 줄임말인 '아짓파'는 고대부터 일본이 교류해 온 아시아와 유럽 문화의 다채로운 감각을 방문객들에게 전해주는 무료 인터랙티브 전시장이다. 한국, 중국, 몽골,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국가는 물론 옛날 일본과 활발한 교역을 벌였던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의 부스가 포장마차처럼 마련되어 있고, 각 나라의 전통적인 의상, 생활용품, 악기, 장난감, 인형 등도 만져볼 수 있어 그야말로 아시아의 활기찬 전통시장에 온 기분이다.
눈길을 끄는 작품들의 전시장인 ‘아지안’과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고고학자 체험을 해볼 수 있는 테마공간 ‘아지갸라’, 그리고 아시아의 음악을 듣거나, 풍경을 볼 수 있는 ‘다나다’로 이루어져 있는 ‘아짓파’의 색깔 있는 콘텐츠들은 '아시아의 교류'라는 공간의 모토를 잘 살리면서, ‘학습’과 '체험'을 '놀이'로 승화시키는 또 다른 즐거움을 주는 곳이다. 전시는 조금씩 변화하지만, "아시아를 느낀다"는 주제를 늘 지켜가고 있다는 그들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한국관에는 팽이, 윷, 제기 등의 전통 놀이기구와 탈, 전통의상 등도 있고, 또 한국의 조각보를 이용한 그림그리기, 퍼즐맞추기를 할 수 있는 체험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호랑이가 그려진 민화도 친숙하다. 게다가 몽골의 전통악기 ‘마두금’, 타이 체스 ‘맥룩’, 인도네시아의 전통놀이 ‘다콘’같은 것도 스스럼없이 만져보고, 재미있게 서로 겨뤄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짓파’를 나서며,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각 나라의 ‘다문화’를 생각한다. 다문화(多文化)는 당연히 ‘복합문화’여야 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문화’여야 맞다. 그냥 여럿이 모여만 있는 게 다문화가 아니다. 지금과 같은 배타적인 이민정책과 고집스런 동화(同化)정책으로는 아시아와 세계를 마음껏 호흡한다는 건 공허한 구호일 뿐이다. 사람들은 ‘다문화’를 통해 창의성을 기대한다. 창의성이란 독립적인 자신의 생각과 표현방식, 자신의 아이디어를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방식이 아닌가. 많은 사람이 눈앞에 바로 보이는 것을 넘어서 그 이면에 감춰진 것을 볼 수 있는 능력, 주변을 보거나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사고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는 ‘다문화’를 ‘아짓파’에서 조금이나마 느껴보기를 기대한다.
일본은 오랫동안 다문화주의적인 생각이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갑자기 다양성을 육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1990년대를 전후해서야 多文化-共存(타분카교세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닛케이진(일본계 외국인)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일본으로 이주하는 사례가 증가함에 따라 지방정부와 비영리단체(NPO)는 이런 노동자와 그 가족을 지원하고 지역 사회에 통합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했고, ‘차이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면 평화가 유지되고 사회가 계속 발전하고 번영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일본의 대부분 지역에서 다문화주의는 갈등으로 비화되지 않았다.
다문화 문제를 '새로운' 문제로 다루기보다는 박물관이 이미 관여하고 있는 맥락에 다문화 문제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의 현재 경험과 인식을 민족, 국적, 종교, 성별, 성적 지향 같은, 박물관이 다루지 않은 다른 문제들을 포함할 수 있는 보다 총체적인 다양성에 대한 생각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공동체에서 소외되었지만, 그들 중 많은 사람들(부모와 자녀 모두)이 새로운 환경과 언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박물관에 가는 것은 마지막 선택일 수 있다. 그걸 ‘아짓파’는 예감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소소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의 가치를 더해가는 두 이름의 도시, 후쿠오카(福岡) #2 (1) | 2024.10.29 |
---|---|
역사의 가치를 더해가는 두 이름의 도시, 후쿠오카(福岡) #1 (0) | 2024.05.20 |
노랫길 따라 바다로 간 김진성PD (0) | 2023.06.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