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도시 후쿠오카(福岡)의 가능성은 일찍이 7세기 후반에 실증되었다.’
후쿠오카시(市)를 알리는 홍보물에 적혀 있는 문구(文句)로, 이 홍보물의 타이틀은 ‘우리는 21세기를 창조한다’. 아시아 문화상을 제정해 매년 1억원의 상금과 ‘아시아를 탐구하는 30일’이라는 이름의 행사를 치르면서 무려 90억의 거금을 쏟아붓는 도시. 지방자치 시대를 가는 우리나라 지자체들에게 후쿠오카 시의 사례는 타산지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예술적이거나, 전통적인 활동의 지원에 늘 적극적인 이 도시는 국제공항의 이름으로는 후쿠오카(福岡), 기차역의 이름으로는 하카타(博多)를 쓰고 있다. 이래도 저래도 다 통하고, 어느 누구든 전혀 헷갈리지 않는 도시이다. 뿐만 아니라 '모두를 위한 예술, 미래를 위한 예술'이라는 예술문화진흥비전 아래 펼쳐지는 다양한 시민활동과, 예술·문화를 통한 도시브랜드의 출발을 알린 후쿠오카는 어느새 많은 수의 문화 관련 시설, 특히 극장과 박물관을 자랑삼는 도시가 되었다.
작가 타카기 노부코(高樹のぶ子)는 ‘후쿠오카는 어떤 도시인가’라는 질문에 ‘하나하나는 크지 않지만 다양한 채색과 모양과 맛의 시설과 기능이 알맞게 집중되어 있어 사람마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도시’라고 답했다. 말한 대목을 냉정하게 따져보면, ‘후쿠오카를 교역(交易)의 도시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에 가깝다. 다들 외지로부터의 온 수입품 뿐이고, 오리지널은 아무것도 없다. 후쿠오카를 문화의 소비도시라고 실토하는 이도 적지 않은데, 그건 하카타의 전통문화에서 순수한 오리지날을 찾아내는 것은 힘든 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다양한 문물을 발빠르게 적극 수용한 역사에 의해 형성된 후쿠오카는 무수한 역사의 파동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키며 고대-중세-근세-근대의 리듬을 연주하여 현대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오리지날이 있는지 없는지 논의하는 것보다 충만한 문화의 특질을 찾는 것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역사에 도시의 정체성을 맞추는 실력은 오래전부터 닦아온 셈이다.
태평양전쟁(제2차 세계대전) 말, 1945년 6월 19일 밤늦게부터 다음 날 새벽에 걸쳐 미군의 장거리 폭격기 B-29 대편대가 후쿠오카시 상공을 비행하며 많은 양의 소이탄을 투하했다. 패전 두 달 전 <후쿠오카 대공습>으로 후쿠오카시 중심부는 불타는 들판이 되고 말았다. 와타나베도리 1초메에서 하카타만까지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한 잔해 뿐인 거리가 된 것이다. 후쿠오카의 부활의 힘은 전후의 불탄 자리에서 볼 수 있다고 전해진다. 그건 바로 다름 아닌 축제. 축제가 후쿠오카를 되살린 것이다. 후쿠오카에서 축제는 신성의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핵심을 이루는 에너지원으로 현대식 단발식 이벤트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축제의 근원에 웅크리고 있는 보이지 않는 역사의 에너지가 시민 파워와 융합하여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폭발력의 기저를 더듬어가면 일본형 ‘크리올(Creole)’이라고도 명명하고 싶은 문화의 혼혈융합에 부딪친다. 크리올은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일본에 오기 시작한 스패니시들에게서 시작되었는데, 카리브해를 둘러싼 섬들의 사람과 문화의 혼혈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이것의 확대원용이 가능했던 것은 후쿠오카의 오랜 역사가 고스란히 교류・교역・혼혈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교류·교역·혼혈의 범위는 넓고 속이 깊다. 그 소용돌이의 에너지가 하카타의 기층에 강력하게 스며들어, 역사의 변형에 부딪혔을 때, 재기의 힘을 발휘해 온 것이다. 지금 아시아를 향해 열린 국제도시를 지향하는 후쿠오카가 지향해야 할 것은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유효성 추구뿐만 아니라 역사속의 하카타에 내재된 중층적인 부활의 에너지 회복과 확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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