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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이야기

역사의 가치를 더해가는 두 이름의 도시, 후쿠오카(福岡) #4

by 뽀키2 2025. 4. 15.

문화도시 혹은 도시문화란 무엇인가. 문화란 ‘자연을 소재로 하여 목적의식을 지닌 인간의 활동으로 실현되는 과정’으로, 종교나 예술, 과학, 문학 등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도시를 문화적으로 재구성하려는 것‘이 문화도시의 개념이며, 목적은 도시 속에서 삶의 질 향상과 경제의 활성화에 있다.
  현재 우리나라 도시들이 추진하는 문화도시는 지역의 문화정체성을 바탕으로 지역의 명소를 부각시켜 투자와 관광객을 유치하는 브랜드 중심의 기업형 도시전략으로서, 관(官)주도의 지역축제와 문화도시만들기 바람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관주도형 도시문화만들기는 막대한 국비를 지원하게 되면서 중앙정부로부터 예산을 지원받기 위한 목적으로 경쟁적으로 추진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지방자치단체장의 치적쌓기용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 중론(衆論)이다.
  오랫동안 수준 높은 교육과 노력에 의해 높은 인격이 형성되듯이 도시의 품격 또한 높은 수준의 문화와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며 이처럼 형성된 도시의 품격은 쉽게 모방하기 어려운 도시의 귀중한 자산이 된다. 자신이 사는 도시에 대한 자부심은 이와 같은 역사문화적 뿌리에서 비롯되며, 이는 도시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도시의 역사와 시민의 향수가 어우러져 있는 박물관을 찾는 것이 그 도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가장 빠른 길이 아닐까. 그리고 박물관이라면 관심을 갖고 찾아온 사람에게 최고의 경험을 하게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갖은 오류와 왜곡을 벗고, 시민과 더불어 활력을 되찾아 멋있게 늙어가듯 되돌아보는 즐거움을 자랑스럽게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공감의 이야기가 모여 있는 박물관’일 것이다. 우리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이래, ‘대구’라는 이름으로 1266년 동안 존재해 온 이 도시를 어느 곳에서,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가. 역사 속에서 배워야 할 자존감이 결여된 도시는 책임감을 갖기 어렵고, 책임감이 결여된 시민이 정의롭기는 더욱 어려운 법. 역사를 사랑한다지만 알지 못하고, 알았으되 힘들어했다면 대구는 지금 몇 시인가.
  도시문화의 가치는 경쟁력에 있다. 그리고 문화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지역 사회를 활성화함으로써 매력적인 사회의 발전을 촉진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자기최면에 빠져 있다’, ‘관이 주도하는 정신승리만으로는 안된다’, ‘문화의 생산자와 중개자, 소비자의 3합이 맞지 않다’, ‘지속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다’ 등으로 ‘대구를 겨냥한 생각들’이 모아졌다. 대구는 매우 현실적이고, 매우 구체적이고, 높은 가치의 지속성을 지닌 도시다. 더 넓게, 더 깊이 동참할 수 있도록 제도와 정책이 받쳐만 준다면 상상을 뛰어넘는 문화 예술적 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도시다. 출발의 도시, 시작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 분지(盆地)가 품은 그간의 역사는 그걸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달성 비슬산(포산)에서 득도한 일연선사가 본리 인흥사(仁興寺)에서 『삼국유사』의 ‘역대년표’를 쓰고, 100년 만에 해금된, 실학의 효시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옻골마을 보본당(報本堂)에서 최초로 교정한 도시. 서슬 퍼런 시절, 상상하기조차도 쉽지 않았던 국채보상을 기치(旗幟)로 항일정신을 요원(燎原)의 불길 마냥 퍼트렸던 도시. 눈빛 맑은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2·28 민주학생운동을 시작한 도시. 우리나라 최초의 시 동인지 『죽순』을 내고, 최초의 시비인 ‘상화시비’를 세운 웅숭깊은 도시가 바로 대구이다. 대구는 어떤 시간이 다가와도 절대로 가만히 있을 도시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지역의 역사를 훼손시키는가. 오류, 왜곡, 방관, 편견, 선입견, 뒷복, 억지, 표절, 재해석에서 역사의 훼손은 시작된다. 어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라도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지역사 왜곡의 대표적 현장을 찾는다.
  첫 사례는 ‘팔공산 승시(僧市)’.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 승시(僧市)는 존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누군가 국도변 교통표지판에서 본 ‘중장터’라는 한글 표기에다 이 말 저 말을 덧붙여 ‘중장’이 있었던 곳이라고 추론하고, 그걸 ‘중장(衆場)’이라 바꿔 쓰고, ‘승시’라고 이름 붙여 대구에서 공식적으로 회자 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장터’라 쓰인 교통표지판이 서 있는 곳은 전라도 화순 운주사 앞 삼거리이다. 그곳은 원래 ‘중촌(中村)’이라는 마을이 있었고, 그곳에 선 시장을 ‘중촌장시’라고 했고, 그 말을 줄여 ‘중장’이라 했으며, 그 오일장이 없어지면서 그곳이 ‘중장터’가 된 것이다. ‘중장(中場)’은 주민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제법 번듯한 오일장 형태로 남아있었지만, 교통의 발달과 주민들의 이주로 1975년에 폐장되었다고 한다. 그 후 중장터 위쪽(중촌) 다리 부근의 우시장은 인근에서 가장 큰 우시장으로 명성을 날리면서 시장의 명맥을 이어오다가 사라졌다.
  지명에 들어간 ‘중’이란 발음에서 초래된 곡해로 심각하게 와전된 것이다. 보통 중촌(中村)이나 중골은 마을 중앙이나 농경지 한가운데라는 의미의 중동(中洞)에서 비롯된 지명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 중(中)을 승(僧)의 개념으로 오해하여 꾸며낸 여러 이야기가 난무하게 된 것은 누구의 책임이어야 하는가. 그 후, 엉터리 스토리텔링으로 치장하면서 ‘스님들의 물물교환 장터’였다더라‘, ‘팔공산 부인사 아래에서 행해졌다더라’, ‘전국에서 유일하다더라’는 식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덧붙이고, 저렇게 이어가며 억장 무너지는 근거를 ‘역사’, ‘연구’라는 빌미로 끌어대기도 하고, ‘최고의 관광자원이 될 수 있겠다’고 당국을 비롯해 많은 이의 몸을 달군 다음, 대구 대표축제의 반열에 올렸다. 어떻게 대구의 진산 팔공산까지 와서 부활했단 말인가? 그동안 적지 않은 예산을 지원하고 추진했던 사람들을 불러 꼭 물어보고 싶다.

후쿠오카 야경
후쿠오카 야경


  두 번째는 ‘순종어가길’. 서울에서는 고종이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간 길을 서울시에서 복원하면서 ‘고종의 길’이라고 명명했다. 한술 더 떠 대구에서는 2017년 4월, 순종의 남순행(南巡幸)이 ‘순종황제 어가길’로 탄생했다. 대구 중구청은 2013년부터 총사업비 70억 원을 들여 대구 수창동·인교동 일대에 거리벽화・남순역사공간을 만들고 달성공원 정문 앞에는 역사의 고증보다는 조형미에 심사의 초점을 맞춘, 대례복 차림의 대형 금빛 순종(純宗)동상을 건립했다. 망국 전 해,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이끌린 순종이 일제 군복을 입고 일본 건국신을 참배하러 다닌 길을 재현하고서는 아픈 역사를 교훈 삼는 ‘다크 투어리즘’이란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고 있는 사람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순종어가길이 관광자원으로 잘 활용되면 ‘번영의 길’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숨을 구멍을 찾는 구차한 변명처럼 들린다. 정말 대구의 그 무엇과도 어울리지 않는 흉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라도 걷어내는 것이 마땅하다.

 


  세 번째는 달성군 비슬산(포산)의 대견사(大見寺) 복원에 관한 왜곡이다. 일연비문(一然碑文)을 포함해 일연선사와 관련된 사료 어디에도 ‘대견사’란 말은 단 한 마디도 찾을 수 없지만, ‘일연선사는 대견사 초임 주지로 22년간 지냈다’고 밝혀두었는데, 일연선사는 대견사가 아닌 비슬산 보당암(寶幢庵)과 묘문암(妙門庵), 무주암(無住庵)에서 일정 기간 머무른 것이며, 보당암이 훗날 대견사로 바뀌었다는 지자체의 주장은 어떤 근거도 찾기 어렵다. 이상한 ‘일연팔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보당암=대견사’라는 억지스러움이 아니어도 비슬산과 일연선사의 가치를 높이고,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감동적 콘텐츠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당시 언론들은 ‘달성군은 대견사 중창을 추진하면서 관련 전문가들에게 검증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것은 물론, 대견사 복원사업과 관련, 달성군이 너무 성급하게 사업을 추진한 것이란 지적도 제기되고 있을 뿐 아니라, 관련기관과 공식적인 협의를 갖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그런데도 무슨 힘을 받아 대견사가 복원되고, 억지스럽게 일연스님을 그 절의 초임 주지로 주저앉혀 버린 것일까. 역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심으로 다시 한번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디자이너 하라 켄야(原研哉)는 ‘일본과 일본의 미래 가능성’에 관해 쓴 책, 『저공비행』에서 ‘물론 문화란 소비재처럼 사용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문화를 계승하는 사람들의 감성 근간에는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것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재현할 힘을 지닌 유전자와 같다. 아시아를 포함한 세계 문화의 다양성에 공헌하고 풍요롭게 빛나게 할 자원을 자국 문화에서 찾아내 미래 자원으로 활용할 때가 도래했다’고 말했지만, 대구시민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계승과 재현, 활용의 길이 많이 막혀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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