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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역사2

대구읍성, 네 남자 사람은 역사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깨닫고, 사회의 책임감을 드러내며, 시대의 정의감을 키우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점철된 역사를 통해 서로 소통하고 통섭하며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 법이다. 스스로 던진 물음에도, 담담하게 말한 대답에도 글로는 다할 수 없었던, 북받쳐 오르는 그 무엇이 있다. 대구읍성이다. 대구읍성은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을까. 대구읍성은 지은 지 171년이 지나 사라졌다. 지금부터 118년 전이다.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는 대구읍성을 쉽게 알아차리기란 누구든 쉽지 않다. 오늘 대구읍성의 축성과 수성에 애쓴 주역들이 대구읍성 이야기를 방백(傍白)조로 들려준다. 영조(1694~1776) 나는 조선 21대 임금 영조다. 숙종임금의 넷째 아들. 최초로 왕세자가 아닌, 왕세제(弟)로 왕.. 2025. 12. 27.
어느 도시의 기록 누군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게 되고,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 같지 않을 거’라 했다. 이렇게 풀어보면 어떨까. ‘지난날을 기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다’고. 한 도시가 있다. 이 도시는 서기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대구(大丘)라는 이름을 얻었다. 올해로 1268년이 흘렀다. 전주, 남해 등과 같이 도시의 이름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1757년(영조 26년)에 유학자 이양채가 공자(孔子)의 아명이 공구(孔丘)라는 이유로, ’고을 읍‘부를 붙여 대구(大邱)라고 쓰자며, 피휘를 거듭 상소했다, 영조임금은 세 차례나 거부했고, 1779년(정조 3년)에는 둘 다 써도 괜찮다 했고, 1854년(철종 5년)이 되어서야 지금의 대구로 굳어졌.. 2025. 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