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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이야기

죽지는 않는 병

by 뽀키2 2025. 5. 2.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는 없더라도, 요즘 어디 아픈 데는 없으신지?  

저자 약력

디지털 시대를 모질게 관통하는 사람들 여럿에게 물어본다. 그들이 호소하는 대표적인 질환은 근시, 눈피로, 안구건조증, 거북목 증후군, 손목터널 증후군, 손가락 건초염, 수면 장애, 주의력 결핍 및 집중력 저하, 우울증 및 불안 장애 따위이다. 모두 디지털 중독(Digital Addiction)이 원인이라고들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디지털의 긴 터널 속에 갇혀있는 우리는 ‘병 같지 않은 병’을 더 많이 앓고 있다. 이름하여, 필터 버블(Filter Bubble), 에코 챔버(Echo Chamber), 그리고 팝콘 브레인(Popcorn Brain)이 바로 그것이다. 이 생소한 이름의 세 가지 질환은 알게 모르게 우리한테 매우 깊숙이 들어와 있다. 
 
  먼저, ‘필터 버블’. 인터넷과 SNS 알고리즘이 개인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면서 다양한 관점이 차단되는 현상을 말하는데, 미국 온라인 시민단체 ‘무브온’ 이사장인 엘리 프레이저(Eli Pariser)가 쓴 책 『필터 버블』에서 처음 등장한 말로, ‘필터(Filter, 걸러내다)’와 ‘버블(Bubble, 거품)’의 합성어이다. ‘편향된 사고에 갇히는 현상, 보고 싶은 정보만 보게 하는 것’이라면 더 이해가 빠를 수 있다. 이른바, 인공지능에 의해 다른 집단과는 만날 수 없는 정보의 평행 사회가 구축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지식의 편향’을 ‘지식이 필터 버블에 갇혔다’고들 표현하지 않는가. 자신의 검색 기록, 클릭 패턴 등을 분석하여 개인이 좋아하는 정보만 노출시키는 과정에서 다양한 정보를 접하지 못하고, 점점 더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정보만 소비하면서 발생하는 병리현상이다. 이 병을 앓게 되면, 반대 의견이나 새로운 시각을 접할 기회가 줄어들고, 사고의 폭도 좁아진다. 정치, 경제, 사회적 이슈에서 극단적인 입장에 서게 되고, 사실 검증 없이 맞춤형 콘텐츠를 신뢰하면서 가짜 뉴스나 음모론에 쉽게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병 아닌 병’이다.

  그리고 ‘에코 챔버’. ‘에코(Echo, 메아리)’와 ‘챔버(Chamber, 방)’의 합성어로,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은 차단되는 현상을 가리키는데, 원래는 방송국에서 ‘잔향감을 주기 위해 인공적으로 메아리를 만들어내는 방’을 이르는 말이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서로 동의하는 의견은 메아리처럼 반복해 울리면서 점점 더 그 의견이 고착화되고 급진화 된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과 소통한 결과, 다른 사람의 정보와 견해는 불신하고 본인 이야기만 증폭돼 진실인 것처럼 느껴지는 정보 환경은 사람들을 병적인 상태에 이르게 한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일종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라고도 볼 수 있다. ‘정신병’이라고 불러도 전혀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병이다. 이는 특히 온라인 커뮤니티 등의 미디어 환경에서 두드러지며, 사람들의 사고와 판단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신과 다른 의견은 무조건 틀렸다고 여기고, 자신이 믿고 싶은 정보만 선택적으로 소비하며,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논쟁하거나 극단적인 반응을 보일 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제 등에서 극단적인 갈등 현상을 자주 겪게 된다.

 

마가렛 헤퍼넌의 책 'Wilful Blindness'. 원본과 번역본 표지
마가렛 헤퍼넌의 책 'Wilful Blindness'. 원본과 번역본 표지

 

 

마지막으로, ‘팝콘 브레인’. 뇌가 튀어 오르는 팝콘처럼 강렬한 자극에만 반응한다고 해서 미국 워싱턴대학교 교수인 데이빗 레비(David Levy)가 만든 말이다. ‘디지털 중독’과 관련된 신조어로,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콘텐츠에 익숙해진 뇌가 현실의 느린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뇌가 디지털 기기의 빠르고 강렬한 자극에 익숙해져 현실에서의 느리고 약한 자극에는 무감각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팝콘 브레인을 가진 사람들은 충동적인 데다가, 자기중심적인 면이 강해 자신의 가치관과 맞지 않는 현실에 부딪히면 강한 반발심을 느낀다. 

  특히 2010년대 들어 태어난 이른바 ‘디지털 네이티브’는 팝콘 브레인으로 발전해 사회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무지를 정당화하는 반(反)지성주의도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환경에서는 숏폼 영상, SNS 피드, 게임 등 짧고 강렬한 자극이 끊임없이 제공된다. 이러한 자극에 익숙해지면 뇌가 마치 팝콘이 튀겨지는 것처럼 빠르게 반응하려 하고, 반대로 현실에서는 집중력과 인내심이 떨어지는 ‘병 아닌 병’의 부작용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 이 정도의 병이면, 겁이 덜컥 나고, 혜택 많은 보험이라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는가. 그런데, 호락호락하지 않는 또 하나가 병이 등장했다. 다름 아닌 ‘의도적 눈감기(Wilful Blindness)’라는 새로운 병이다.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이라도 뇌의 본능과 어긋나면 고의로 무시해버리는 이 병은 보고도 못 본 척할 뿐 아니라, 아예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깨끗이 잊어버리는 ‘뇌의 비겁함’이 증상이라면 증상이다. 영국 BBC 출신 저널리스트 마가렛 헤퍼넌(Margaret Heffernan)이 맨 처음 쓴 말로, 인간이 왜 자꾸 위기를 자초하는 행동을 되풀이하는 지 연구하다 뇌가 우리 행동의 원천이라는 점에 착안, 뇌에서 그 답을 찾았다고 알려져 있다. ‘고의적으로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와 조직을 붕괴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녀는 여러 실험과 연구를 통해 눈감기의 결과로 우리에게 크고 작은 사건과 위협들이 닥친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내부자들이 회사의 부정을 알면서도 침묵해 터져버린 엔론(Enron) 스캔들, 많은 금융 전문가들이 거품을 알았지만 무시해서 벌어진 2008년 금융 위기 등을 기억해내면 될 것 같다. 이렇게 ‘뇌의 비겁한 속성’이 쌓이고 쌓여 극단적으로 나타난 결과는 도대체 병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뇌의 본능적인 회피 성향을 극복하려는 노력만이 이 병을 예방하는 핵심적인 방법이라는데, 어느 누가 처방전을 내밀어 줄 수 있는가? 단순한 개인의 심리적 습관이 아니라, 조직과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는 점에서 비판적 사고와 침묵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며, 다양한 시각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은 하지만, 디지털에 대응하는 기초체력이 약한 우리는 자신이 없다.

  이 병들은 걸렸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 병’이다. 그렇지만, ‘죽음보다 더 깊은 병’일 수 있다. 또, 나만 건강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건강으로 이웃도 건강해진다는 생각으로 치유의 시간을 이어가야 하는 병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변화에 발빠르게 대처하는 기술이 아니라 지금의 변화를 근본적으로 숙고하고 함께할 수 있는 것들을 시도해 보는 일이다. 우리를 구원해 주는 건 기술이나 예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이 시대, 그런 역량을 발휘하면 예술도 기술도 도리어 우리가 구원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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