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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이야기

어느 도시의 기록

by 뽀키2 2025.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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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게 되고,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 같지 않을 거’라 했다. 이렇게 풀어보면 어떨까. ‘지난날을 기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다’고. 

  한 도시가 있다. 이 도시는 서기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대구(大丘)라는 이름을 얻었다. 올해로 1268년이 흘렀다. 전주, 남해 등과 같이 도시의 이름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1757년(영조 26년)에 유학자 이양채가 공자(孔子)의 아명이 공구(孔丘)라는 이유로, ’고을 읍‘부를 붙여 대구(大邱)라고 쓰자며, 피휘를 거듭 상소했다, 영조임금은 세 차례나 거부했고, 1779년(정조 3년)에는 둘 다 써도 괜찮다 했고, 1854년(철종 5년)이 되어서야 지금의 대구로 굳어졌다.
 
  이 도시가 기록한 역사의 몇 토막을 기억해 본다. ‘실학의 효시’라 칭송받는 반계 유형원의 명저『반계수록』(1670년)이 금서 100년의 세월을 지내고, 왕명으로 보본당(報本堂)에서 최초의 교정본(1770년)으로 간행된 곳이 대구이다. 1900년 3월, 한국최초의 피아노가 달성 나루터 사문진으로 들어오고, 1900년 선교사 헨리 부루엔에 의해 야구가 국내 최초로 들어온 도시도 이곳이다. 박태준 선생이 작곡한 한국최초의 가곡 ‘동무생각’(1925년)이 태어난 곳도 대구이며. 한국최초의 바리톤 김문보가 대구제일소학교에서 연 그의 독창회(1926년) 역시, 한국최초의 바리톤 독창회로 기록된다. 한국최초의 클래식 감상실은 이창수 선생이 지켜온 ‘녹향’(1946년)이며. 성악가 오현명의 목소리로 기억하는 가곡 ‘명태’도 그곳에서 탄생되었다. 전국에 산재한 3천여 기의 시비 중에서, 최초의 시비는 ‘마돈나 나의 침실로’가 새겨진 달성공원의 이상화 시비(1946년)이며, 1958년에 처음 세워지고, 1970년에 다듬어진 한국최초의 어린이헌장비(1958년)도 달성공원에 있다. 게다가, 이윤수 시인의 주도로 창간된 한국최초의 시동인지 ‘죽순’(1946년)도 대구의 웅숭깊은 자랑거리다. 홍해성 선생(1894년생)은 한국최초의 연출가로 기억되는 인물이며, 언론인 김영보는 한국 최초의 창작희곡집 ‘황야에서’를 1922년에 출간한다. 박남옥 감독은 한국최초의 여류감독으로 그의 첫 영화 ‘미망인’(1955년)은 경북여고 동문들의 후원으로 대구에서 먼저 개봉하고 서울에서 상영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구는 특수교육의 요람’이라는 큰 명성을 얻게 된 한국최초의 사립맹아학교가 1946년 대구에 문을 연다. 존경받는 이영식 목사가 인간의 존엄을 살피는 큰 일을 시작한 것이다.

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 2학년3반 단체사진 구본인씨 제공
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 2학년3반 단체사진 구본인씨 제공


  전국에서 최초로 학도호국단이 창설(1948년)된 곳도 대구다. 한국전쟁 당시, 김석원 장군의 피 끓는 격문에 분연히 일어나, 낙동강전투 승리, 대구사수 등도 이 앳띤 청춘들에게 큰 힘을 입은 바 크다. 인도군 나야 대령의 죽음을 기억하는 한국최초 전몰군인 충혼비(1952년)가 대구에 있으며, 한국전쟁 중에 서울에서 피난 온 중학생 5천여 명을 3년간 가르친, 처음이자 마지막 정규학교, 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1951~1954)도 이곳에서 문을 열고, 닫았다. 대구장학사들의 노고가 감동적이었다. 단순한 청강용 천막 교실이 아니었다. 고난의 시간, 그 학교를 다닌 학생들은 전후 한국사회를 이끈 큰 인물들이 되었다. 한국최초의 소아병동(1953년)이 美 월드비전의 첫 해외 봉사활동의 결실로 대구에서 개원했다. 월드비전 창립자 로버트 피어스가 미국 종군기자로 한국전에 참여했고, 명덕초등학교를 방문한 그의 사진을 보면 먹먹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대구 서문시장 맞은편에는 ‘W’ 자 기둥의 그 병원건물이 아직 남아있다.

  1962년에는 ‘도동 측백나무숲’이 천연기념물 1호로 지정되었다. 1967년 한국 최초의 지방은행인 ‘대구은행’이 탄생했고, 2002년 창단된 대구FC는 한국프로축구 최초의 시민구단으로 기록되었으며, 2003년에는 대구오페라하우스가 오페라 전용극장으로는 국내 최초로 문을 열었다. 한국기네스위원회는 2001년 대구약령시를 한국 최고(最古)의 시장으로 인정했고, 이어서 국내 최초의 한방특구(2004년)로 지정되었다. 2002년 대구수목원이 문을 열었는데, 이는 쓰레기매립장이 생태공원으로 변한 한국 최초의 사례였다. 서울 마포구 난지도 매립장의 변화와는 결이 다른 것이었다. 2015년엔 도시철도 3호선이 개통되었는데, 그것 또한 한국최초의 모노레일로, 대구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등장하게 된다.

  게다가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삼국유사』가 대구 인흥사에서 맨처음 집필이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무척 큰 역사적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일연선사는 자신의 생애 여든여섯 해 동안 전국 11개 사찰과 4개 암자에 머물렀고, 그 세월 속에서 꾸준히 채집한 이야기로, 자신이 득도한 비슬산과 멀지 않은 인흥사에서 우리 민족의 대기록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삼국유사』의 현창사업은 대구가 도맡아야 한다.

  이 역사의 편린만 들여다 봐도 대구는 시작의 도시, 출발의 도시, 창의의 도시임을 그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었던 승시(僧市)를 엉터리 스토리 텔링으로 버무려서 ‘팔공산 승시(僧市)’축제로 만든 것, 순종이 일제 군복을 입고 일본 건국신을 참배하러 다닌 남순행(南巡幸)을 ‘다크 투어리즘’이란 궁색한 변명까지 붙여 ‘순종황제 어가길’로 만든 것, 그리고 일연선사와 관련된 사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대견사(大見寺)의 복원으로 이상한 ‘일연 팔이’를 하고 있다. 이렇게 억지스러움이 아니어도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감동적 콘텐츠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갖은 오류와 왜곡을 벗고, 시민과 더불어 활력을 되찾아 멋있게 늙어가듯, 대구는 되돌아보는 즐거움을 자랑스럽게 느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지금 일어나는 일을 잘 기록하는 것, 기록된 경험을 잘 보존하는 것, 그리고 기록을 통해 잘 재현하는 것이 역사의 행로가 아닌가. 역사라는 말은 ‘면면(綿綿) 히’라는 말과 호응하기 때문에, 지금은 그 역사를 통해 청춘세대와의 접점을 어떻게 더 늘려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젊은이들로 하여금 오류. 왜곡. 방관, 편견. 선입견. 뒷북. 억지, 표절 등을 넘어 바른 역사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수업인지를 경험케 했으면 좋겠다.

  대구를 알면 알수록 인물, 저술, 활동들이 본래 면목을 드러낸다. 1268년 동안 한 이름으로 존재해 온 도시를 우리는 어느 곳에서,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가. 모두에게 묻고 싶다. 역사 속에서 배워야 할 자존감이 결여된 도시는 책임감을 갖기 어렵고, 책임감이 결여된 시민이 정의롭기는 더욱 어려운 법. 역사를 사랑한다지만 알지 못하고, 알았으되 힘들어했다면 이 도시는 지금 몇 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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