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통기타 음악 중흥기 이끈 주역
국민 일상 속에서 더욱 가깝게 공예를 접하고, 즐길 수 있는 행사가 열린다. 한국 포크음악 발전에 기여한 김진성 PD가 지난 5월 18일 별세했다. 향년 86세. 가요계 등 관계자에 따르면 후두암 말기 판정을 받은 고인은 서울 연희동 연세요양원에서 별세했다. 김 전 PD는 KBS, TBS, MBC를 거쳐 CBS 라디오 PD로 일했다. '영 840', '세븐틴', '꿈과 음악 사이에', '올 나잇 팝스' 등 음악 프로그램을 주로 연출했다. 특히 고인은 1970년대 통기타 음악의 중흥기를 이끈 주역으로 알려져 있다. 고인은 공개방송 프로그램 '포크 페스티벌'과 청소년 음악 프로그램'세 븐틴'을 통해 김민기, 양희은, 한대수 등 포크 가수와 개그맨 고영수를 방송에 출연시켰다. 최근까지 KBS '가요무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일보 5월 20일 자 참고] 이 글은 상주노릇을 한 포크가수 정형근의 ‘김진성 PD 추억담’이다. 기독교방송(CBS). 그때는 종로 5가 기독교회관 9층에 있었다. 편성국 들어가는 입구에 다양한 용도의 소파가 있었다. 방문객들이 관계자들을 기다리기도 하고 PD, 기자, 아나운서들이 간단하게 미팅도 하는 곳이었다. 모기가 막바지 극성을 부리던 때였으니, 늦은 여름 아니면 초가을쯤으로 기억한다. 형과 나는 비스듬히 앉았 다. 기울어진 우리 앞으로 방송국 직원들은 바쁘게 오가는데, 음악얘기, 예술얘기, 살아가는 인생얘기 전혀 없이 형은 ‘바로 노래해 보라’고 했다. 그런데 소파 밑에는 종아리에 기어올라 붙는 모기들이 있었다. 형은 숙달이 되었는지 수시로 찰싹찰싹 팔이며 다리를 때리며 내가 노래하기를 기다렸다. 나도 그런가 보다 하고 기타를 잡았다 ‘지상의 노래’, ‘보리야!’를 불렀다. ‘합격’이었다 그게 오디션이었다. 오후 4시쯤이었다. 손이며 다리에 아주 작은 모기들이 죄 달라붙어 계속 괴롭혔다. 마침 방송국 건너편 2층에 개업하는 중국집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하고 오후 7시 ‘세븐틴’ 생방송에 바로 출연했다. MC는 양희은 씨였다. 그렇게 시작된 김진성 PD와의 인연은 45년 동안 이어졌다.
주말이면 형은 춘천으로 왔다. 술도 밥도 시간도, 모 든 걸 서로 나누었다. 내가 아프거나 형이 아플 때도. 춘천 인근의 산들을 같이 다녔고, 좋은 책과 세상의 모든 음악을 나누었다. 같이 교회도 다녔다. 삶과 허무도 같이 나누었다. 의리니, 우정이니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간혹 다른 사람들을 지켜보면, 저 사 람들은 너무한 사람한테 치우쳐 있어 관계의 균형이 깨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형하고 나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형과 나는 여덟 살 차이. 그러니 좋은 시간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술 먹다 형한 테 엄청 두들겨 맞기도 하고, 다투다 전화를 던져버리듯 끊은 적도 많았다. 우리 엄마는 진성형을 싫어했다. ‘진성이가 너의 인생을 망쳤어’라며. 멀 쩡히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게 한 것도 형이라고 했다. 형은 30년 후. 어머니 팔순잔치에 와서 수저 한 세트를 선물하며 사과했 다. 우리 엄마는 그때 형을 용서한 것 같았다. 식사 기도 때 이렇게 기도하 신 걸 보면. ‘진성 씨가 건강하게 주님과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며칠 전에도 형은 은수저 사건을 ‘신의 한 수’라 고 기억해 냈었다. 딴따라 바닥은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장마당이다. 조금만 손해 본다 싶으면 바로 떠나버리는 바닥이다. 나는 형하고 지내면서 서로를 떠나지 않았다. 떠나지 않았다는 건 배신하지 않았다는 거다. 이건 나의 작은 자랑이다. 가끔 만나던 ‘들국화’ 기타리스트 손진태가 늘 궁금해하고, 부러워했던 그런 관계였다. 사람 속은 모른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 자라면서 지금까지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모든 사람은 똑같다. 아니 그렇게 다르지 않다. 사랑하길 원하지 만나는 사랑을 더 받길 원하고, 물질적인 것도 자신이 더 받길 원한다. 그런데 형과 나는 다행스럽게도 서로 가진 게 없다 보니 그런 마음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 덕에 서로 마음 근처에는 갔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서로의 마음을 굳이 알 필요가 없었다.
형은 밥 딜런, 우디 거스리, 피트 시거 등 성좌 같은 포크 음악가들을 소개하고 가르쳐 주었다. 물론 프랭크 시나트라, 사라 본, 엘라 피츠제럴드 같은 스탠다드 가수들도 가르쳐 주었다. 그러면서 난 촌티를 벗으며 무감각, 무관심에서 깨어날 수 있었고, 로맨틱과 비극적인 저항도 배울 수 있었다. 형은 노래를 못한다. 지금까지 노래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노래방에 가면 탬버린만 흔들 뿐 절대로 노래는 하지 않는다. 그런 형이 쓸쓸해 보일 때가 있었다. 그것만은 아니겠지만 형의 악기는 세상의 음악으로 가득 찬 자신의 영혼이었다. 형은 ‘사람이 얼마나 슬픈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며, ‘음악이 상처를 치료하고 위로하니, 그래서 음악 이 멋진 거’라며, 진심으로 노래를 부르고, 노래를 사랑하라’고 했다. 나는 형의 골호(骨壺)를 들고 ‘지상의 노래’와 ‘보리나무’를 부르며, 그의 바람 대로 바다장(葬)으로 갔다. 그와 함께한 많은 사람들이 그와의 모든 것을 바다에 쏟아버리고 ‘지상의 한 칸 방’으로 죄다 돌아왔다. 그리고는, 탬버린 소리가 아득히 들리는 듯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정형근 싱어송라이터. 1979년 10ㆍ26사태 후 우연히 여성잡지에서 '김진성 PD, CBS로 돌아오다'라는 기사를 보고 무작정 찾아가 오디션을 통과해 “세븐틴” 프로에 고정 출연을 했다. CBS 프로그램 "꿈과 음악 사이에", "세븐틴" 등에 출연하면서 가수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87년 첫 앨범 <호수에 던진 돌>을 들고 서울과 춘천을 수회에 걸쳐 콘서트를 했다. 그 후 <나는 당신의 바보>, <한 송이 들꽃으로>, <야간 비행>, <효도탕>, <예언자>, <바닷물 먹지 마>까지 7집의 앨범을 발표했다. 시를 읊조리 는 듯한 그의 노래는 한번 빠져들면 정말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는 꽤 오래 준비해 온 신곡 ‘김진성 PD’를 곧 발표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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