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소한 이야기

슬픈 개그

by 뽀키2 2025. 10. 19.

 

요즘 많은 사람들은 코미디란 말보다 개그란 단어를 더 친숙하게 여기는 것 같다. 나는 개그라는 말만 들어도 재미를 느낀다. 그 계산된 시퀀스에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기 때문이다. 가끔 세련되지 못한 '몸 개그'를 볼 때면(슬랩스틱 코미디도 훌륭한 장르이긴 하지만)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그 슬픔이 깊어지면 때로는 노여움으로 변한다. 이제 정치판의 개그 소재는 누구나 쉽게 찾아낼 정도로 식상해졌다. 하지만 신성장 동력으로 기대되는 문화콘텐츠를 생산하는 문화판을 생각하면 괜히 안타까워진다. 오랫동안 나는 현장에서 이곳저곳을 다니며 ‘슬픈 개그’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슬픈 개그는 무지(無知)에서 생긴다. 만용(蠻勇)으로 커간다. 기억나시는지, ‘기본을 알아야 한다’고 외쳐댄 과자CF에 머쓱했던 순간을. 

  셰익스피어에게 원작자 도장을 받아오라는 공무원. ‘그는 죽었다’고 대답하니, ‘유족이 있을거요’라고 힘주어 일러주는 기막힌 공무원(난, 그때 ‘셱스펴印’이라는 목도장을 새겼으면 통과되었으리라고 믿는다). 언제나 마지막엔 ‘뜨겁게 달군 감동의 무대였다’고 ‘주례사’같은 헌사(獻辭)만 쓰는 평론가. 웹진(webzine) 대신 광고전단만 뿌려대는 첨단정보회사. 경제학 도서인 『아시아의 드라마』를 연극책으로, 연극책 『어릿광대의 정치학』을 정치학 서적으로 분류해 놓은 잘난 대형서점. 이 어려운 책을 ‘누가 감히’ 하며 겁도 없이 베껴먹는 가엾은 삼류(三流)들. 대본 뒷부분 몇 쪽이 없어진 줄도 모르고 돈이 됐던 ‘서울’연극을 복제하는 연극인.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게임이나 포르노 사이트를 본다고 생각하는 원시인 부모들. 독자란에 작품이 실려버린 시력(詩曆) 30년 향토 중진시인의 비애. 다리미보다 전기세 많이 나오는 조명등 말고 ‘밝은 형광등을 켜고 공연하라’ 훈시하는 대학극 지도교수. 성능 좋은 PC 옆에서 석간신문을 베껴 새소식이라고 전해주는 지방방송국 아침프로그램. 내일의 숙제도 미리 알고 있는 학교앞의 기적(奇蹟)문구점. 오탈자가 더 많은 문화행사 리플렛. 영어(tantara)에서 나온 ‘딴따라’를 극구 ‘일본어가 어원’이라 우기는 분들. 『삼국유사』를 쓰신 일연스님 얘길 했더니, ‘요즘 일연스님 어디 계시노?’하며 끼어드는 그 분. 대구읍성, 달성토성 외에도 고성동이라는 지명으로 볼 때, 예로부터 성곽도시 대구에는 성(城)이 3개가 있었다는 한 컨설팅업체의 막무가내식 설명. 전문가의 값비싼 연구 결과라 틀림없겠거니 하고 넘어가 주는 사람들. 팔공산 부인사 앞에서 예전에 전국 유일의 승시(僧市)가 열렸는데, 복원하여 대구를 대표하는 문화 콘텐츠로 만들어야 된다는 주장은 '고증자료가 있느냐'는 물음에 '없다는 증거를 대보라'는 식의 억지로 바뀌었다. 아, 알고는 계시는지, 우리가 슬픈 개그의 시대에 길들어 살고 있다는 것을.

  논란이 되면 좋을 것 없는 결정을 위해 '누가 뭐래도 어차피 해야할 일인데…'하며, 언론사가 가급적 취재를 오지 않았으면 하고 보도자료를 아끼는 사람들도 슬픈 개그의 멋진 소재다. 문화행정, 문화정책을 위해 발로 뛰지 않고 엎드려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이들은 '복지부동'이라고 했지만, 아마도 그들은 '신토불이'라고 정정을 해줄 것만 같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광개토대왕비가 대구땅을 지나갔다'는 그럴듯한 소문(?)에 그 비의 복원을 서둘렀던 사람들, 오페라 공연장 무대에서 족구를 즐긴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는 이를 뒤집어지게 하는 개그 소재다.

  또한 자신의 입신과 양명을 위해 문화판을 정치판으로 만드는 사람들, 기득권 틈입을 위해 한때 자랑스러워했던 자신의 이력을 감추는 사람들, 해프닝에 가까운 이벤트로만 문화를 이해하는 사람들, 벤치마킹이라는 미명하에 값싸고 편한 ‘베끼기’로만 문화를 만들려는 사람들, 예로부터 완장 찬 문화는 문화적 범죄로 이어진다는 개연성을 괴담 취급하며 무시하는 사람들. 임기(任期)라는 온실에서 문화를 웃자라게 하거나 성장을 억제하는 기술을 보여주는, 우리가 선택한 사람들. ‘알면서 모르는 체’하는 이와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이보다, 더 웃기는 사람은 ‘모르면서 모르는 체’하는 사람인데, 이 또한 슬픈 개그의 주인공들이다.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 중에 어느 것이 더 클까? 이것은 지(知)와 무지(無知)를 판단하는 중요한 질문이다. 그것에 관해 토론을 한 경전이 있다. 불교경전 중에서는 매우 이색적이고 특이한 분위기를 가진 경(經)인데, 그 이름은 『밀린다 팡하』(Milindapanha). 『나선비구경』이라고도 한다. 밀린다는 고대 인도-그리스 왕국인 박트리아(大夏)왕 메난드로스(B.C.163~105)의 인도식 이름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지역에서 태어나 왕위에 올랐다. 사람들은 그를 인도의 아쇼카왕에 비유한다. 『밀린다팡하』에서 밀린다왕과 고승 나가세나(那先)가 불교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 대화는 ‘그리스와 인도의 만남’이라는 문명사적 토론이 되었다. 이 때 나가세나는 ‘현자(賢者)의 방식’으로 토론하자고 말했다. 곧 계급장을 떼고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나가세나여,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는 어느 쪽의 죄가 더 크겠습니까?“ 
”대왕이시여, 시뻘겋게 달궈진 쇳덩어리를 어느 사람은 모르고 잡았고, 또 한 사람은 알고  잡았다 할 때, 누가 더 많이 데겠습니까?” 
“나가세나여, 모르고 잡은 사람이 더 데겠지요.” 
“대왕이시여, 그처럼 모르고 나쁜 짓을 한 사람의 죄가 더 큰 것입니다.”

  이 대화는 소크라테스의 어록에 있는 이야기와도 비슷하다. “알고 악을 행하는 것은 모르고 악을 행하는 것보다 낫다”. 


  암수가 다른 꽃이 있다. 이들의 수정은 바람, 나비, 벌, 새들이 돕는다. 우리의 문화는 서로의 자태를 한껏 뽐내지만 암수가 다른 꽃나무같다. 더구나, 번식을 돕는 수정도우미들도 끼리끼리 편이 나눠져 있음을 알게 되면 또 슬퍼진다. 많은 이들이 이 도시문화의 백화난만(百花爛漫)은 한국전쟁 당시의 피난문화 밖엔 없었다고들 말하는 자괴를 어찌 씻으랴.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에겐 사무치도록 슬픈 개그가 있단 말인가. 모든 것을 그저 ‘몰랐다’고 퉁쳐 버릴 수만은 없는 것이다.  

  개그맨 전유성선생의 책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와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를 보면서, ‘즐거워지는 것은 조금 비겁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알아서 못하거나,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닌, 마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슬픈 개그들이 끊임없이 터지는 문화판에서 몇몇의 문화 생산자와 문화 중개자들은 오늘도 열심히 그 역할을 다하고 계신다. 이제부터라도 어이없는 문화의 시간, 더 이상의 ‘슬픈 개그‘를 결코 즐겨서는 안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