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년 전 캐나다로 이민길을 떠나는 나에게 사람들은 ‘영문과 나왔으니 말 안 통해서 못할 일은 없겠네’라며 빈말 격려라도 했지만, 이국땅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영어의 한글 표기법과 현지의 실제 발음은 천양지차다. 예를 들면, 우유를 뜻하는 'milk'의 현지 발음은 '미역'에 가깝다. 정직하게 글자 그대로 '로또'라고 하면, 종일 기다려도 로또 한 장 사기 힘들다. ‘라로’라고 해야 금방 알아차린다. 캐나다의 수도는 ‘토론토’Toronto가 아니라 ‘터로노’라 불린다는 걸 알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10여 년 동안 한국어 방송의 PD 노릇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동포들을 대상으로 <나의 영어체험>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듣게 된, 은근한 감동과 쓴웃음을 준 에피소드들을 늘 떠올린다. 당시 한국에서는 영어 광풍이 불었다. 백인 강사를 찾아다니고, 혀를 잘 굴러야 한다며 어이없느 수술을 해대고,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매국적' 주장까지 나돌던 때였다. 영어를 잘하나 못하나 가늠하는 잣대는 여럿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실력은 ‘슬기로운 영어생활’에서 나오는 건 틀림없다.
정직과 성실은 강철 심장도 녹인다
커피숍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던 갓 이민 온 한국 아줌마에게 한 외국인 신사가 ‘슈가프리, 플리즈 Sugar free, please’ 하며 커피를 주문했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두 스푼의 설탕을 넣어 커피를 건넸고, 그 외국인은 벌컥 화를 내며 나가버렸다. 당황한 아줌마가 어쩔 줄 몰라 할 때, 아르바이트 유학생이 귀뜸했다. “설탕을 넣지 말라는 뜻인데…” 그녀는 얼른 뛰어가 더듬거리며 영어를 잘 몰라서 그랬다며 사과했다. 마침내 그 이란계 신사는 ‘옛날 생각난다’며, ‘이해한다’며 도리어 다독였다는 이야기. 이후 그는 물론 그의 회사 동료까지 단골이 되었고, 오래지 않아 그녀는 그 커피숍을 인수했다. 이민 와서 영어를 배우는 첫 마음은 정직함, 성실함이라는 울림을 주는 이야기였다.

효자손의 신통한 효자 노릇
사람이 꽤 많이 다니는 길목의 한인 편의점. 가게 안에서 커피를 마시며 버스를 기다리기도 하는 제법 큰 가게였다. 어느 날 젊은 주인 내외 대신 한국에서 온 지 며칠 안된 노모가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할머니는 단 세 마디의 영어로 가게를 지켰다. 가게를 들어서는 손님에게 ‘하이 Hi’. 바코드를 찍을 때 ‘땡스 Thanks’. 돌아서는 손님에게 ‘바이 Bye’가 전부. 하지만, 할머니의 등 뒤에는 100종이 넘는 담배가 있었다. ‘이민자들 발음이 제각각인데 저걸 제대로 팔 수 있을까’ 그러나 기우였다. 담배를 사러 온 흑인 청년에게 할머니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손에 쥐고 있던 효자손을 내밀었고, 오직 그가 가리키는 담배를 꺼내 바코드를 찍으며 ‘땡큐!’. 그걸로 끝이었다. 효자손으로 완수한 ‘슬기로운 이민 생활’ 아닌가! 아들보다 낫다는 진짜 '효자손의 용도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통신문 한 구절에 으쓱한 엄마
영어 때문에 눈물겨운 어머니들을 여럿 만났다. 일터에서 늦게 돌아온 이웃집 엄마는 애들을 재우고 밤이 이슥하면 우리 집을 찾아와, 우리 집 큰애한테 학교알림장 해석을 부탁하곤 했다. 고마운 마음에 몰래 용돈도 주고 갔다. 그리고는 다음 날 아들의 등교를 챙겨 주면서 한마디를 하는 식이었다. “어제 엄마가 통신문 보니깐 다음 주 필드트립 갈 때 양말 한 켤레 더 가져오라 그러던데? 그리고 피넛 버터 갖고 오지 말라고 적혀 있더라. 준비물이 많던데 엄마가 좀 도와줄게”. ‘어? 우리 엄마 영어 잘하네!’ 이웃집 엄마의 자존심을 살리는 일이라면 뭐든 도와주리라 생각했다.
의사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아들을 치과의사로 키운 한 어머니는 한인 타운에 있는 아들 병원에서 몇 년째 어설픈 통역사로 안내데스크를 지키고 있다. 어릴 때 이민 와서 영어를 제대로 못 배울까봐 한인들이 없는 동네에 집을 구했고 한인 교회의 주일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공부시켜 아들은 엄마의 꿈을 이루어 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란 아들의 병원에 한국인 환자들이 찾아오면 속수무책이었다. ‘주일학교라도 보내고, 한국인 친구라도 사귀게 할 걸 그랬어요. 너무 후회되네요.’

8학군을 만드는 건 생활의 지혜
이민 와서도 좋은 학군 찾으려 애쓰는 열성엄마들을 많이 보았다. ‘그런 게 없다’는 얘기에 적잖이 실망하는 눈치를 보이던 엄마들에게 올드 타이머 한 분이 아이디어를 냈다. “여기서 8학군 당첨은 자녀를 잘 키운 분들이 사는 동네에 가서 이웃이 되는 겁니다. 뉴커머(New Comer)부모들은 올드타이머(Old Timer)댁에 가서 이민 생활의 지혜를 얻고, 아이들은 그 집 언니 오빠방에 올려 보내 애살있게 공부 이야기를 물어보게 만드는 거. 그게 쌓이면 8학군 이상의 결과를 낳습니다.”
자원봉사로 일석이조
영어의 나라에서 전혀 꿀리지 않고 살아가는 엄마들은 참 대단했다. 어느 엄마는 이민 초기부터 열심히 자원봉사를 하러 다녔다. 조금 부족해도 다독이고 배워 가며 할 수 있는 일들을 열심히 했고, 차츰 전문성 있는 일에 이르기까지 열정적으로 봉사했다. 정규직에 결원이 생기자 바로 취업의 문이 열렸다. 동료들이 영어 실력, 성격까지 눈여겨 봐 왔던 터라 주저 없이 ‘코리안 맘’을 뽑은 것이다. 이민 가면 만날 수 있는 괜찮은 자리의 한국인들 중에는 그렇게 정착한 분이 적지 않다.
영어 동화책 읽기의 소득
어느 엄마는 자녀들이 영어 잘하는 비결을 가르쳐 달라는 이민자들에게 명쾌하게 이런 답을 들려줬다. 매일 밤, 어린 딸아이가 자기 전에 큰소리로 짧은 세계명작동화를 세 권은 읽어 주고 재웠다고 했다. 책은 도서관에서 처분하는 동화책을 얻고, 주말마다 동네 야드세일을 다니면서 모았다. 발음연습에다, 좋은 문장을 외우고 어휘력까지 늘일 기회, ‘일석삼조’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그 아이는 영어에세이대회에서 큰 상을 여러 차례 받으며 네이티브 사이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영어권이라고는 하지만 이민자의 나라에서 들리는 말은 그 종류가 상상을 초월한다. 자기들의 이야기를 하다가 소통을 위한 장치로 공식어인 '영어'가 등장하니 그 발음이나 어휘는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나는 한국인의 영어 실력을 교육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 얘기를 전하고 싶다. 말하기, 쓰기, 듣기, 짓기로 구분되는 영어 실력을 키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이라는 것을. 절실한 삶에 맞닿아 있는 진심'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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