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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이야기

대구읍성, 네 남자

by 뽀키2 2025. 12. 27.

사람은 역사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깨닫고, 사회의 책임감을 드러내며, 시대의 정의감을 키우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점철된 역사를 통해 서로 소통하고 통섭하며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 법이다. 스스로 던진 물음에도, 담담하게 말한 대답에도 글로는 다할 수 없었던, 북받쳐 오르는 그 무엇이 있다. 대구읍성이다. 대구읍성은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을까. 대구읍성은 지은 지 171년이 지나 사라졌다. 지금부터 118년 전이다.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는 대구읍성을 쉽게 알아차리기란 누구든 쉽지 않다. 오늘 대구읍성의 축성과 수성에 애쓴 주역들이 대구읍성 이야기를 방백(傍白)조로 들려준다.

영조(1694~1776) 나는 조선 21대 임금 영조다. 숙종임금의 넷째 아들. 최초로 왕세자가 아닌, 왕세제(弟)로 왕위에 오른 임금이야. 이름은 ‘밝을 금(吟)’자를 쓰지. 잘한 일이 많지.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켜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왕한테 직접 알리게 한 것도 바로 나지. 근데, 사도세자의 비정한 아비, 정조의 엄한 할아버지로 기억하는 이들이 더 많을걸. 내가 여든 살까지 살아서 조선의 임금 중에서 가장 장수한 임금이고. 게다가 무려 51년 7개월 왕 노릇을 했지. 고구려 장수왕께서 78년. 발해 문왕께서 57년, 신라 진평왕께서 53년을 왕위에 계셨으니. 나는 우리 역사상 네 번째로 왕 노릇을 오랫동안 한 셈이지. 그건 그렇고, 대구 땅에 경상감영이 들어서고, 경상감사 겸 대구부사 민응수가 대구에 읍성을 쌓는 걸 허락해달라고 조정에다 요청을 했어. 기억으로는, 1736년 겨울이었어. 내가 왕이 되고 열두 해 지난 땐데 좌의정 김재로가 내게 '경상감사 민응수가 대구성(大邱城)을 쌓도록 청했습니다.' 그래. 왜냐고 물었더니 '대구의 지형이 비록 성을 완벽하게 지키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울타리로 막는 장치는 있어야 한다'고 하더래. 먼저 경상감사를 지냈던 조현명이도 대구에 성을 쌓는 게 필요하다고 벌써 여러 차례 말을 해서. 김재로가 전해준 민응수의 청을 기쁘게 허락했지. 두 사람 모두 백성을 생각하는 반듯한 생각을 갖고 있는 믿을만한 내 사람들이니까. 대구읍성은 진실한 성이야. 애민정신이 깃든 성이지. 여러 인재들의 노력이 쌓여 세워졌고, 60년 후에 수원화성을 탄생시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니라.

대구읍성 축성과 수성의 주역들. 왼편부터 영조임금, 조현명, 민응수, 김세호
대구읍성 축성과 수성의 주역들. 왼편부터 영조임금, 조현명, 민응수, 김세호 (일러스트:오금택)


조현명(1690~1752) 저는 조현명입니다. 1730년 6월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을 했고, 이조, 병조, 호조판서에다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까지 두루 지냈습니다. 제가 경상도 관찰사였던 시절, 대구읍성의 축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당시에는 많은 이들의 반대에다, 가산산성을 수리하는 것이 더 급하다고 해서 아쉽게도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대구를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가산산성으로 들어가자는 의견은 많이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나마 6년 뒤에 관찰사 민응수에 의해 멋진 대구읍성을 보게 되었으니 너무 기뻤습니다. 저도 기여를 했다고들 말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1731년에 동래읍성을 개축하고, 1733년에 전주성을 쌓는 데도 힘을 좀 보태긴 했습니다. 대구성을 쌓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민응수 대감과는 나이는 제가 여섯 살 어리긴 하지만 엄청 친한 사이입니다. 제가 전주읍성을 쌓는 과정을 기록한 <축성계초>라는 책도 빌려주고. 동래부사로 있던 친구 정언섭 대감도 동래읍성 축성과정을 기록한 <축성등록>을 보여줬다고 하네요. 아무튼. 모든 공은 민응수 대감에게 돌아가는 게 맞습니다만. 저를 동래성-평양성-전주성에 이은 완벽한 대구성의 축성을 이루어낸 공로자라고 말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감사합니다. 또 후대 전문가들이 '대구읍성은 조현명에 의한 동래읍성과 전주읍성의 완결점에 있다'는 과분한 평도 해주셔서 정말 황공할 따름입니다.

민응수(1684~1750) 저는 민응수입니다. 동래부사, 전라도, 경상도 관찰사에다 병조, 이조.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을 지냈지요. 제가 1735년 경상감사로 부임했는데, 대구가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인데도 읍성 하나 갖추지 않아. 영조 임금께 대구읍성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1736년 1월, 좌의정 김재로는 민응수가 대구에 읍성이 필요하다는 걸 강조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물론 저보다 먼저 경상감사를 지낸 친구 조현명도 '읍성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적혀있습니다. 대구읍성 축성에 제 공이 크다고들 하시지만. 임금의 귀한 허락으로 쌓게 된 것이니 세간의 평은 과분합니다. 저도 경상도 관찰사 부임 이전에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전주 풍남문을 세운 적이 있습니다만. 조현명 대감, 정언섭 대감이 쓴 <축성계초>와 <축성등록>이란 책이 없었다면 더 어려웠을 겁니다. 참. 저는 대구읍성을 쌓으며 생긴 여러 가지 일을 <영영축성비>에 빼곡히 적어 남겼습니다. 그 비는 지금 망우당공원에 서 있습니다. 제가 대구를 떠날 때 저를 진심으로 환송해준 분들의 마음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영세불망비>, <무휼승도비>도 여태 경상감영공원에 남아있질 않습니까. 조정에 돈을 내려달라 보채지 않았고, 매일 공(功)을 세운 이들에게 상을 내리니 모두들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쌓은 것 같습니다. 12월 13일 경상감영 선화당에서 300여 명이 모여 낙성축하잔치를 열었던 일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대구읍성은 실학과 탕평의 정신으로,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쌓은 성이란 걸 다들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60년 후에 수원화성을 쌓은 다산 정약용도 우리가 기울인 마음과 정성을 이어 쌓았다고 생각한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김세호(1806~1884) 저는 김세호입니다. 1869년에 이조참판에서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고, 그 전에는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탐관오리를 여럿 잡아들인 적도 있습니다. 제 이름이 좀 낯설면 당시 130년 쯤 전에 지은 대구읍성을 멋지게 ‘리모델링한 사람’으로 기억해주십시오. 제가 대구부사를 지내던 그 시절은 서구의 열강들이 동양으로 진출하고. 우리 조선도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국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고, 더구나 대원군께서 전국의 군사시설을 보완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라고 명을 내리던 그런 때에, 축성 100년이 더 지난, 퇴락한 대구읍성을 총 경비 7만전을 들여 보수하게 되었는데, 그 일을 제가 맡게 된 겁니다. 체성의 높이를 좀 더 높이고, 동서남북에 4개의 누각을 세웠습니다. 그것이 동쪽 정해루, 서쪽 주승루, 남쪽 선은루, 그리고 북쪽 망경루입니다. 대구읍성을 보수하면서 했던 여러 일은 '수성비(修城碑)’에 제가 자세히 적어서 남겼습니다. 지금은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해서 민응수님이 세우신 영영축성비와 함께 서 있습니다. 저는 대구에 있으면서, 경상도의 71개 군과 현의 지리지들을 모아 경상도 지리지인 「교남지」를 펴내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대구읍성을 통해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와, 문화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대구가 '성곽도시'의 일원으로 세계 문화도시의 또 다른 반열에 올랐으면 하는 바람으로 전문가의 목소리를 나누고 경청하는 자리가 많이 열렸으면 좋겠다. 위대한 문화콘텐츠는 그런 노력들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거듭 얘기하지만, 대구읍성은 ‘축성(築城)의 교훈’보다 ‘훼철(毁撤)의 증오’로만 남은 성이 되면 안 된다. 더 이상 사라진 안타까움과 지켜내지 못한 아쉬움으로만 우리 문화를 이해하지 말자는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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