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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이야기

신인류(新人類), 로이 G. 비브

by 뽀키2 2025. 10. 22.

‘로이 G. 비브(Roy G. Biv)’는 무지개를 구성하는 7가지 색깔(Red, Orange, Yellow, Green, Blue, Indigo, Violet)의 첫 글자이고, 각 색은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니면서도 조화로운 전체, 즉 무지개를 이룬다. 이것은 다문화정책과 매우 흡사한 철학적 비유로 사용된다. 이제는 다문화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명사가 된 로이 G. 비브. 그는 다문화사회의 은유적 상징이며, 각기 다른 정체성이 서로를 지우지 않고도 함께 아름다울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각각의 색깔은 ‘문화’가 되고, 무지개는 ‘사회 전체’를 상징하고 있다. 빨강이 주황으로, 파랑이 보라로 ‘동화’되거나 ‘삭제’되면 그건 무지개가 없는 단색의 하늘이 되어버린다. 다문화정책은 바로 그런 원리로 동화가 아닌 공존, 지배가 아닌 조화를 지향하는 것 아닐까.

  내친김에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다문화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애써 외면하고 싶었지만 엄연한 현실이 되어버린 현상, 쉽게 생각해서는 다루기 어려운 문화, 복지차원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개성과 다름을 반겨야만 해결되는 문화가 바로 ‘다문화’이다. 나는 우리의 ‘다문화현상’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리 흡족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다문화를 다룬다는 명분으로 공공자금의 지원으로 만들면서도, 너무나 엉터리없는 TV프로그램이 오죽 많은가!) 그래서 ‘한국적 다문화’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보다, ‘다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먼저이고, 더 중요하다고 늘 생각했다. 여러 면에서 균형감을 잃지 않고 편견 없이 접근했으면 하는 바람을 다양하게 표현해 본 적도 있었다. 

  굳이 미국의 요즘 상황을 눈여겨보지 않더라도, 21세기 들어 첫 10년 동안 서구 국가들은 국경 통제를 강화하고 반이민 담론을 강화하는 등 다문화주의가 쇠퇴하는 것을 목격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세계 여러 곳에서 다문화주의라고 불리는 것이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자유주의 엘리트들의 실패한 실험으로 간주하면서, 그 부식되어 사라져버릴 것 같은 유산처럼 평론가들과 정치인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 세계와는 다른 차원의 공동체, 무책임한 문화상대주의, 그리고 민족의 '삶의 방식'과 보편적 가치를 뒤집어버리는 중세적 관행과도 너무 흡사하다. 결코 다르지 않다.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다. 진짜 다문화주의는 소수의 제도적, 문화적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서로 이웃으로 받아들일 때 진정한 다문화주의가 형성되는데, 2005년 이후부터 나름 일반화된 ‘다문화’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 제대로 된 논의를 해본 적이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미 알고들 계시겠지만, 한국의 순혈주의 신화는 무너졌다. 그 자리엔 다문화주의 신화가 들어섰고, 이제는 인구 5%가 외국인인 다문화 국가로의 전환기에 있다. 겉으로 보는 다문화정책과 달리 현실 속에서 갈등의 골은 깊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여기에다 봇물처럼 터지는 ‘다문화현상’까지 겹쳐지면, 매우 당혹스러워진다. 다문화라는 용어는 엄격하게 말해서 멀티컬쳐니, 크로스컬쳐를 무책임하게 우리식으로 표현한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본래 의미인 ‘복합문화’라는 뜻은 어떤 뉘앙스도 찾을 길이 없다. 이민사회의 대표적인 문화현상인 ‘용광로문화’, ‘신선로문화’를 지극히 평면적으로 표현한 조어(造語)에 지나지 않는다. 용광로이론, 샐러드볼이론, 동화주의, 문화다원주의, 공생정책, 조화정책 등이 무더기로 등장하면 혼란스럽기 그지 없다. 다수자들로 하여금 소수자들의 문화도 배우게 하자는 성찰도 일어나고, 존재의 다름과 같음을 이해하면서 다른 존재자들과도 함께 잘 어울려 살 수 있는 문화를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다문화의 바른 전형을 보여준 파르시(Parsi)족의 '설탕과 우유'이야기를 표현한 그림

  페르시아 사산 왕조의 멸망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파르시(Parsi)족은 ‘넘칠 듯 잔에 가득 담긴 우유에 넣은 설탕은 녹아 맛을 달콤하게 만들지만, 우유를 넘치게 하지는 않는 것처럼, 우리는 사회에 설탕처럼 녹아 스미는 그런 민족이 되겠다’고 왕을 설득해 인도 듀(DUI)섬에 정착했고, 그런 마음으로 후손을 가르치며 세계 속으로 퍼져 나갔다. 이 절묘한 어울림은 파르시족을 명민한 민족으로 세계 각처에서 살아가게 했고, 다문화의 바른 전형을 보여준 유명한 이야기이다. 또하나의 예화는 더 와닿을 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다름‘이다, 예술은 등수를 매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던 백남준(1932-2006. 비디오 아티스트)은 ‘다문화’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만나는 첫 이정표가 된다. ‘다름’은 길들여진 고정관념을 깨고 나오는 것 아닌가. 어느 비평가가 백남준을 가리켜 ‘세계적 보편성(universality)을 만든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을 들었다. 그는 ‘바이 바이 키플링’(1986)으로 ‘동은 동, 서는 서, 두 쌍둥이는 서로 만날 수 없도다’라고 표현한 영국의 문인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의 단언을 무색하게 했다. 

파르시(Parsi)족의 후손인 작가 스리티 움리가(Thrity Umrigar)가 쓴 『우유에 녹아든 설탕처럼』. 8세기, 박 해를 피해 인도의 한 섬으로 피신한 선조들의 이야기 를 담았다.


  2000년대에 들면서 우리 사회에는 이주민, 결혼이민자, 외국인 노동자 등이 증가하면서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생겼다. 이때 일본의 ‘다문화공생(多文化共生)’이라는 정책개념에서 용어를 차용, 쉽고 직관적이며 한자 문화권에 익숙한 표현으로 “다문화”하는 말을 채택했던 것이다. 아직 우리 의식 속에는 다문화에 대한 개념이 불확실할 뿐 아니라 그들을 대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불안정한 상태이다. 외국인과의 접촉, 외국과의 교류는 증가하고 있지만, 편견에 사로잡혀 다문화에 대한 이해와 국제적 에티켓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한 문화전문가는 문화의 공존공영을 위해서 문화의 단계를 들어가기-소통하기-뛰어넘기-세우기로 분류했다. 이것이 문화를 이해하고, 교감하고, 수용하여 창조하는 과정이라고 볼 때, 종교의 귀한 가르침을 알고 실천하는 신-해-행-증(信解行證)의 단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설픈 엄숙주의가 배제된 문화는 우리에게 건강한 종교처럼 작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순혈주의가 사라져 가면서도, 다문화에 대한 거부감도 여전히 심한 상황은 자문화중심주의(Ethonocentrism)의 타파가 필요하다는 걸 알려준다. 공존을 지향하는 ‘다문화’는 최근 등장한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라는 꽤나 희망적이고 점잖은 신인류의 문화로 발전할 것이다. ‘미래에는 협력하는 인간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탄생한 ‘공생인간’이 다문화를 행복하게 가꿔갈 것이다. 다문화는 양자택일이 아니다. 이제 독불(獨不)의 마음을 벗고, 다문화를 누려보자.

무지개는 원래 다양성과 조화를 상징하는 보편적인 이미지이기 때문에, 다문화(multiculturalism)와 성소수자(LGBTQ+) 모두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원, 맥락, 색구성이 서로 다르다. 다문화 교육, 이민정책, 포용적 사회 캠페인 등에서 무지개는 ‘차이의 조화’를 표현하지만, 1978년 길버트 베이커가 만든 성소수자의 레인보우 플래그는 다양성, 자긍심, 그리고 해방과 연대를 상징한다. 그리고 초창기에는 8색을 사용했지만, 지금은 6색을 사용한다. 남색(Indigo)이 빠져 있어 무지개와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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