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로부터 한자를 전수받은 일본이 2016년 교토(京都)에 세계 처음으로 한자박물관을 개관했다. 교토 관광의 정점이라는 기온(祇園) 입구에 지상 2층으로 세워진 박물관은 1층에 4세기 백제 왕인(王仁)박사의 한자 전수에서 이어진 한자의 역사를 다양한 유물과 그림 등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늘 뉴스의 중심에 있는 ‘올해의 한자’도 볼 수 있었다. 2층은 부모와 자녀들이 다양한 게임이나 ‘갑골문자’를 활용한 디지털 프로그램을 통해 한자와 친숙해지면서 배울 수 있는 놀이공간으로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자칫 어렵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 있는 한자라는 콘텐츠와 최첨단 IT가 만나서 펼쳐보이는 프로그램은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며 한자놀이의 세계에 빠지게 만든다. 한자말 물고기를 낚아 올리면 그것이 초밥이 되어 올라오고, 내 몸을 이용해 한자를 만들어보고, 애니메이션으로 상형문자인 한자의 원리를 터득하다 보면 한자공부는 어느새 재미있는 놀이가 된다.
기발한 기획전도 감탄할 만하다. 교육한자, 상용한자들로 만든 벽지 디자인도 아름다웠다. 조금이라도 한자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1층에는 한중일 공용한자 808자를 알려주는 코너가 있다. 한중일 세 나라의 문화계를 대표하는 ‘한중일 30인회’가 제정한 ‘공용한자 808자’는 세 나라의 일상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기본 한자들이다. 공용한자 제정의 필요성은 우리가 처음 제기했으며, 서울에서 500자가 선정됐고, 일본에서 800자로 늘렸다. 그리고 중국에서 29자를 넣고, 덜 쓰이는 21자를 빼면서 808자가 되었다.
‘문화의 축이 서구에서 아시아로 옮겨지고 있는 이때에 한중일 공동상용한자를 제정함으로써 새로운 아시아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는 언론보도도 전시되어 있었다. 중국의 간화자(簡化字), 일본의 약자(略字)보다 정자(正字)를 쓰는 우리가 한자권의 종주국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오늘날 지구상의 약10억 정도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지적 전통을 물려받은 사람들이라면, 그보다 훨씬 많은 20억 정도는 고대 중국의 지적 전통을 물려받았다고 볼 수 있다. 희랍어, 라틴어의 전통과 한자의 전통이 철학과 문명, 사고방식의 차이를 가져왔다는 주장이다. 오늘날 한국인에게 한자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전시장을 지나면서, 우리도 ‘우리말 한자’만이라도 가르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글, 영어, 한자가 혼재된 혼란스러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야하고, 우리말과 결합된 한자의 바른 사용법도 가르치고, 일본어투 한자를 잘못 사용하는 사례를 고치기 위해서라도. 게다가 박물관에 전시된 주요 책의 이름이라도 읽을 수 있게, 문화재 답사길에서 방문지의 전각이나 편액의 뜻을 알 수 있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자어를 한자로 쓰지 않고 한글로 쓰면 그 의미는 사라지고 소리만 남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한자를 배우지 않아서 고전은 달달 외지만, 생활한자는 모르는 세태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우리말을 지키려면 한자도 지켜야 한다는 고집을 부리고 싶다. 한자는 중국의 문자인 동시에 동아시아의 문자다.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과 일본에서 나름의 독특한 문자문화를 이루었다. 이렇듯 한자문화의 스펙트럼은 생각보다 넓다. 그런 의미에서 이 한자박물관의 가치는 엄청나지 않을까. 교토한자박물관을 두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식의 상투적인 치사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을 느꼈다. 왜 우리는 가질 수 없는가. 양반문화, 선비문화, 유교문화를 고양하는 지역에서, 또는 어느 자랑스러운 문중(門中)에서, 또는 향교, 서원, 서당에서 우리도 ‘눈 밝은’ 한자박물관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된 미래’, ‘온고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이런 열쇳말들이 꿈틀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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