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일 이른 아침 전남 순천의 뿌리 깊은 나무박물관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선다. 대구를 출발해서 고속도로를 달려 남해고속도로 순천만 IC에서 2번 국도로 나와 연동삼거리에서 민속마을길로 접어들어, 쌍지삼거리를 거쳐 17km 남 짓, 뿌리 깊은 나무박물관에 도착했다.
최고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세일즈맨에서 우리 토박이 문화를 애써 지키고 되살리는 파수꾼이 되었던 한창기(1936~1997) 선생의 치열한 생애가 녹아 있는 곳, 뿌리 깊은 나무박물관. 뿌리 깊은 인간을 찾아간다면 쉽게 이해가 될까. 그 길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나무,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깊은 물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용비어천가'의 한 대목을 떠올려 인기드라마 촬영현장이 박물관으로 변한 거라 짐작하는 사람은 차마 없었으면 좋겠다. 5년의 연구 끝에 마침내 1976년 3월 창간한 최초 한글전용 가로쓰기 잡지 '뿌리 깊은 나무' 어려운 한자말이 순우리말로, 현대인에게도 잊혀진 토박이말로 다시 태어났다. 그 지면의 글들은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고 싶을 만큼 바르고도 유려했다. 이후 '뿌리 깊은 나무'는 한국의 잡지역사를 나누는 분수령이 되었다. 기라성 같은 필진에서부터 우리 삶의 구석구석 생각지도 못했던 글감을 찾는 기획력, 단어 하나 사진 한 장에도 심혈을 기울인 단아한 편집 그건 감히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센 바람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나무는 1980년 8월,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고 말았다.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새로운 문화판을 배우고 그 길을푯대삼아 가고자 했던 청춘들에게는 날벼락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자기 목소리를 고집한 발행인 한창기는 흔들리지 않았다. 1984년 11월, 결이 비슷한 여성지 '샘이 깊은 물'을 창간하고 버티었다. 그는 1997년 유명을 달리했고, '샘이 깊은 물'은 2001년 11월 창간 17주년 기념호를 끝으로 지금껏 휴간 상태다.
당시 펴낸 기획물 또한 우리 책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전통사회의 황혼에선 사람들’을 찾아 그 삶의 궤적을 기록한 '어사는 외톨박이' 전 2권, 생생한 토 박이 입말로 살려낸 평범한 사람들의 삶 이야기 '중자서전' 전 20권은 지금도 책 좀 본다는 이들의 애장서 목록 맨 앞을 차지하고 있다. 당대최고의 인문지리지라 할 '한국의 발견' 전 11권은 당시언론사기자와 PD들이 늘 옆에 끼고 보던 책이었다. 그는 또 사라져가는 판소리 보급과 보존을 위해 ‘열린 판소리 감상회’를 100회 넘게 마련했고 '뿌리 깊은 나무 판소리전집'을 LP 23장으로 냈다. 이를 통해 우리 판소리에 대한 인식을 바꾼 지식인이 어디 한둘이랴.
이 땅에 뿌리를 둔 모든 것에 대해 지극한 사랑을 품고 전통과 문화를 선별해 다듬어가며 새로운 전통을 발명하려 애썼던 한창기. 너무나 일렀던 그의 죽음에 비해 그를 기억하는 공간의 설립은 무척 더뎠다. 순천시에 기증한 그의 분신 같은 6,500여 점의 소장품은 그의 유지를 받든 주변사람들의 노력으로 2011년 뿌리 깊은 나무박물관으로 되살아났다. 전시장에는 작심하고 모은 듯 하나같이 정겨운 유물들이 빼곡하다. 우리 문화를 사랑했던 마음의 끝을 알 수 없는 다양한 볼거리와 들을 거리는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책장마다 그의 호흡이 갈피갈피 끼워져 있고, 판소리 대목마다 그의 호방한 추임새가 숨어 있다. 또 전통 옹기에는 번득이는 유약의 흔적처럼 그의 애정 어린 눈빛이 가득 묻어 있다. 그가 쓴 '뿌리깊은나무' 창간사에서 그 핵심을 읽는다. - “안정을 지키면서 변화를 맞을 슬기를 주는 저력 그것은 곧 문화입니다”. 어떤 교과서에도 등장하지 않고, 무엇 하나 돈 될 것 같지 않은 유물들만 모여 있는 이곳에서 저녁 무렵 수오당의 긴 그림자를 밟고 서서 “널리 알리지 않았어도 알고 찾아와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우리 땅 낯선 이들에게 ‘가당찮은 생떼’를 써본다.
뿌리 깊은 나무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단소와 거문고명인 백경 김무규(1908-1994)선생의 고택 수오당과 부속건물 여덟 채 가 있다. 모두 선생의 고향인 전남 구례 절골마을에 있던 생가 건물을 옮긴 것이다. 수오당은 한낱 미물인 까마귀의 효행을 보고 ‘까마귀 보기에도 부끄럽다’는 의미의 당호다. 1980년 한창기는 이 고택을 보고 한순간에 매료되었는데 그로부터 26년 후인 2006년 뿌리깊은나무재단에서 매입해 이곳으로 이건했다.사랑채 누마루는 영화 <서편제>에서 백결 선생의 거문고 연주 촬영지로 제공되기도 했다. 이 수오당의 누마루와 맞은편의 뿌리깊은나무 전시관은 두 사람의 전통문화사랑으로 오래 전부터 한 몸이었던 듯 조화를 이루며 방문자들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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