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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박물관 이야기

토종은 미래의 가치, 그 시작을 알린 충남 예산 한국토종씨앗박물관

by 뽀키2 2023.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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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회자되는 명시 「황무지」에서 T.S.엘리엇은 겨우내 죽은 듯한 대지를 뚫고 수수꽃(라일락) 싹이 돋아나는 경이로움을 보고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 노래했다.

박물관 입구
한국토종씨앗박물관 입구

토종은 미래의 가치, 그 시작을 알린다

씨앗의 힘과 그걸 살피는 농사의 힘. 인류의 가장 큰 발명은 단연코 농사다. 농사를 통해 인간은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고 거기서 얻은 생산물 덕분에 혹독한 겨울을 견뎌낼 수 있었다.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참 햇볕이 곱고, 바람이 순한 곳이다. 이런 소담한 농촌마을에 한국 최초의 토종씨앗박물관이 있다. ‘토종을 살려보겠다’는 오기 반, ‘씨앗을 베고 죽겠다’는 각오 반으로 만든 그야말로 ‘토종 무지렁이’ 박물관, 씨앗을 공공재인 국가유물로 등록한 대한민국 유일의 박물관이 탄생한 것이다. 2017년 문을 연 35평 남짓(116m²)의 작은 박물관에는 1,500여 종의 토종씨앗들이 맵시 있게 빼곡히 들어앉아 있다. 처음부터 박물관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수년 전, 강희진 관장의 부인 김영숙(슬로푸드 전문가)씨가 토종씨앗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육종도 중요하지만 보존도 중요하다’는 사실에 눈뜨면서 박물관을 생각하게 되었다. 부부는 단 한두 종만을 위해서라도 전국을 누비면서 그들의 발자국 소리에 눈 뜬 생명을 만났고, 그 ‘역사성’에 주목했다.

전시 된 싸앗들
씨앗들

전시관에 들어서면 채종과 씨앗마실을 통해 모은 예산의 토종씨앗들이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전시실 중앙은 수수한 카페처럼 꾸며져 체험교육공간으로 쓰인다. 사람들이 몰려오는 날이면 토종과 씨앗의 정신적 가치를 배우는 형형한 눈빛들이 가득 차게 되는 곳이다. 그 옆방은 우리나라 토종의 산증인이요 선구자인 안완식 박사가 씨앗의 역사성을 기록하는 박물관의 취지에 공감해 기증한 씨앗들과 연구자료·사진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완식박사 기증관
이완식박사 기증관

이 박물관에서 ‘길 위의 인문학’ 행사로 ‘토종씨앗 나눔’이 열렸다. 원래 씨앗은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라 서로 나누는 것이었므로 그야말로 ‘토종은 미래의 가치, 한국 토종씨앗박물관은 그 미래의 시작’이라는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멋진 세상을 움틔우려고 토종씨앗 이야기를 듣고 나누었다. 실은 씨앗박물관의 해설 패널 자체가 인문학 강의실에 다름 아니었다. 씨앗이 이토록 매혹적이라는 사실을 어느 누가 이렇게 찬찬히 일러줄까 싶을 정도다. 

박물관 전시실
전시실

인도말 ‘브리히’(가을에 익는 벼)가 여진말 ‘베레’(흰 쌀)를 거쳐 마침내 ‘벼’가 되고, 인도말 ‘사리’(겨울에 익는 벼)가 ‘쌀’이 되었다는 설명으로 우리 주식(主食)의 어원을 알게 된다. 메밀로 소설가 이효석을 이야기하고, 감자로 신경숙의 소설과 고흐의 대표작을 떠올리게 한다. 콩은 추사 김정희, 녹두는 녹두장군 전봉준, 무는 허균, 수박은 소설가 황순원의 작품과 연결시킨다. 신숙주와 녹두나물에 얽힌 야사도 있다. 호밀빵이 독립투사들의 눈물 젖은 끼니였다는 내용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아일랜드에 감자 전염병이 돌아 감자를 먹지 못한 사람들이 아사했는데 그 수가 수백 만, 인구의 4분의 3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감자의 제주어)로 감자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씨앗박물관의 당당한 존재감을 느꼈다. ‘씨앗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없다’는 사실을 찬찬히 일러주어 맹목적 믿음으로 ‘토종’을 강조하는 곳이 아니라는 확신을 안겼다.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나' 새삼스러운 토종씨앗들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나' 새삼스러운 토종씨앗들

세계는 씨앗전쟁 중이다. 지구에서 하루에서 사라지는 종자가 70여 종이라고도 한다. ‘농업생물다양성의 교두보’인 토종씨앗을 외면하고 ‘씨앗주권’을 지키지 못한 대가는 생각 이상으로 혹독할 수 있다. “토종씨앗박물관이 나라를 지키는 독립군은 아니지만, 우리가 우리 땅에서 먹고 자란 씨알의 역사를 간직한 씨앗 수문장은 될 것”이라는 강희진 관장의 말에 경의를 보낸다. 토종씨앗 한 알 한 알마다 화장세계(華藏世界)가 들어 있다. 나는 그렇게 공들여 모은 씨앗들을 귀하게 여기는 그곳을 ‘될성부른’ 박물관, ‘뿌린 대로 거둘’ 박물관이라고 이름 붙여보았다.

한국 토종씨앗들
왼쪽부터 아주까리밤콩, 적토미, 찐보리,참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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