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박물관’이라고 해야 할지, ‘오럴 뮤지엄(Oral Museum)’이라고 해야 할지 아직도 망설여지는 곳. ‘이야기 군단(軍團)’쯤으로 번역될 ‘스토리코어(StoryCorps)’라는 독특한 이름은 ‘구술기록’을 모은 것으로 박물관을 기능을 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의 역사가 모여 있는 곳’이라 하면 좀 더 적당한 표현일 수 있을까.
이러한 구술기록 프로젝트를 창안한 사람은 전직 라디오 프로듀서인 데이브 아이세이(Dave Isay)다. ‘어떤 사람이든 저마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이 이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역사’와 ‘이야기’의 어원은 모두 라틴어 ‘히스토리아’로 모인다. ‘역사=이야기’라는 의미다. 역사에 그냥 지나간 시기가 없듯이, 인생에도 그냥 지나친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데이브 아이세이는 2003년 뉴욕에서도 가장 번잡한 그랜드센터럴 역 앞에 조그만 녹음부스를 마련하고 지나가는 가족이나 연인, 친구끼리 40분 동안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게 했다. 그들 보통사람들의 대화, 그것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반향을 몰고 왔다.
2005년부터는 대포알같이 생긴 중고버스를 개조한 이동 부스를 몰고 미국 전역에서 보통사람들의 대화 목소리를 직접 담았다. 스토리코어가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도시의 부모·형제·친구·사제 들의 녹음 신청이 쇄도했다. 그들은 그간 차마 말하지 못했던 ‘미안하고, 고맙고, 자랑스럽고, 사랑하고, 용서한다’는 메시지를 작은 녹음부스 안에서 서로 나누었다. 그들의 대화는 화려한 무용담이나 연극 같은 인생체험기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로 들려주는 진정한 삶의 모습이었다.
이 기록들은 책으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 이 경이로운 프로젝트의 대화들은 공영 라디오 NPR을 통해 전국에 방송되고, 미국 의회도서관에도 보관된다. 이민사회·다문화사회 등 복잡한 미국사회를 통합하는 소중한 지혜를 얻었다는 논평이 이어졌다. 이 프로젝트로 2015년 테드 프라이즈(TED Prize)를 수상한 데이브 아이세이는 “보통 사람들의 인터뷰가 역사의 한 기록으로 남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라고 소감을 밝혔다. ‘스토리코어의 미래’를 물으니 ‘인간의 지혜를 모으는 더 큰 디지털 보관소가 되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야기로 모아진 데이터가 지혜가 된다’는 그의 생각이 놀랍다. 이런 작업이 관 주도도 아니고 방송사 프로그 램의 부산물도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값어치가 높다.
TV와 신문의 감동적인 다큐멘터리와 특집기사를 우리는 오래 기억하고 고마워한다. 하지만 더 많은 따뜻한 이야기, 더 깊은 슬픔을 길어올리는 장치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 모든 것을 언론사에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좋은 화질로 담아야 한다는 과욕도 버리고, 언론사만 나서야 한다는 편견도 버리고, 예산이 넉넉해야 할 수 있다는 의타심도 버려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큰 울림이었다. 역사의 주인공들이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너무도 쉽게 쓸려 가버린다. ‘세상은 오히려 자신을 잊으라 했다’는 설움을 안고 사라지는 주인공들도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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