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일본군‘위안부’처럼, 서구 사회는 ‘홀로코스트(Holocaust)’가 늘 트라우마이다. 1993년 2월 개관한 미국 LA의 ‘관용의 박물관(Museum of Tolerance)’은 이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인종차별의 폐해와 인간에 대한 잔학 행위를 돌아보고 인류의 반성을 유도하는 취지에서 건립되었다.
포로수용소의 생존자로서 전범 색출과 홀로코스트 실상 폭로에 앞장선 유대인 영웅 지몬 비젠탈(Simon Wiesenthal)의 이름을 따서 1977년 설립된 유대인 연구단체 ‘지몬비젠탈센터(Simon Wiesenthal Center)’가 5,000만 달러의 기부금을 낸 것이 건립의 초석이 되었다. 개관 후, 13만 명의 학생을 포함해서 매년 25만 명이 찾는 이곳은 전 세계 언론이 추천하는 ‘꼭 봐야 할’ 명소가 되어 있다. 이곳 전시실은 동선과 관람시간에 따라 자동으로 문이 열리고 닫힌다. 정해진 관람시간을 채우지 않고는 박물관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얘기다. 첫 전시실에서는 들어서면 홀로코스트 이전 유럽 유대인들의 생활이 소개되고, 나치 독일의 어느 거리를 배경으로 히틀러 자서전 『나의 투쟁』이 베스트셀러로 팔리는 장면이 보인다. 처참하게 폭격당한 미니어처 거리와 유대인 처리방법을 논의하는 장면도 있다. 1,100만 유대인의 나라별 분포도도 보인다
유대인 집단거주인인 게토(ghetto)로 꾸며진 문을 들어서면 홀로코스트가 소개된다. 학살당한 유대인 수는 586만 명. 그 입구의 ‘Never to Return!’이란 글이 섬뜩하다. ‘가스실’을 재현해 놓은 마지막 전시실에서는 양쪽 콘크리트 벽에 걸린 사진과 동영상 속 증언을 통해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남몰래 흐느끼는 노령의 방문객을 보면서 나는 이 광경이 세계에 만연한 인종차별의 슬픈 미래가 아닐까 착각에 빠졌다. 마지막 화면 속에 고정된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자매의 웃는 모습이 한참이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출구가 열리니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났다. 출구 옆 또 하나의 문구가 있다. ‘희망이란 것은 기억할 때 살아있는 것이다
마침 ‘관용의 박물관’에는 ‘안네 프랑크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1929년 네덜란드의 유대인 소녀 안네가 태어난 프랑크푸르트와 1934년 가족이 도착한 암스테르담의 거리를 지나면 살해된 150만 명의 아이들이 연상되는 빛바랜 옷들을 켜켜이 개켜 놓은 원형복도를 지나게 된다. 안네의 유물·사진과 함께 13회째 생일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의 복제품과 세계 30개국에서 번역·출간된 『안네의 일기』, 지몬 비젠탈이 안네를 체포한 사람을 추적하기 위해 사용했던 게슈타포 전화번호부, 암스테르담 백화점에서 찍은 사진과 펜팔 편지들…. 전시장은 260도 스크린으로 2년간 숨어 있던 식료품공장 뒷방처럼 꾸며놓고 안네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까지 들려준다. 『안네의 일기』가 허구라는 파시스트의 주장을 반박하며 철저한 추적 끝에 안네 체포자 칼 실버바우어를 찾아낸 이도 비젠탈이었다.
“나는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이 정말 착하다는 것을 믿는다”는 『안네의 일기』한 구절에 가슴 아파오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나는 터치스크린 앞에 서서 수용소에서 장티푸스로 죽은 16세의 안네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겠노라 서약서를 썼고, SNS로 여러 사람에게 날렸다. ‘관용의 박물관’을 나서며 서구 사회가 역사의 망각과 퇴행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최근 프랑스에선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인권의 아이콘이었던 시몬 베이유의 사진이 나치 문양으로 훼손된 채 발견되기도 했다. 언론들은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세대가 사라지면서 반(反)유대주의라는 금기가 무너졌다”고 하고 경계하는 중에도 좌우의 젊은 계층 다수가 반유대주의 선동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똘레랑스(관용, tolérance)’가 도리어 인종주의와 파시즘까지 포용하라는 빗나간 탕평(蕩平)의 프레임워크가 된 이유는 또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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