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영천 은해사(銀海寺)는 아름다운 절이다. 불·보살·나한 등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를 이루고 있는 듯해서 ‘은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날 때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다. 신라 헌덕왕 1년(809)에 창건한 이 절은 동화사와 더불어 진산인 팔공산을 대표하는 사찰로 소문나 있다. 하지만 전국에 흩어져 있는 추사 글씨가 이곳에 가장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특히 흥미롭게도 만년에 든 추사의 자취를 이곳에서 만끽할 수 있다. 1847년의 화재로 소실된 은해사를 중건하면서 혼허 스님은 추사에게 현판 글씨를 부탁했다. 「은해사 중건기」(1862)에 주지 혼허 스님이 “대웅전, 보화루, 불광 세 편액은 모두 추사 김상공(金相公)의 묵묘(墨妙)”라고 밝혀놓았으며, 당시 영천군수 이학래는 「은해사연혁변」(1879)에서 “문의 편액인 은해사, 불당의 대웅전, 종각의 보화루가 모두 추사 김시랑(金侍郞)의 글씨이며 노전의 일로향각(一爐香閣)이란 글씨 또한 추사의 예서”라고 했다.
추사의 글씨가 새겨진 현판을 이고 있는 전각의 내력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추사의 글씨가 이곳에서 복각되어 도처에 나눠진 것을 보면 그 원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백흥암의 방장실인 진영각의 편액인 ‘시홀방장’과 6폭 주련에 써진 유마경 구절도 추사의 속마음을 보여준다. 특히 주련의 칠언시는 누구나 쉽게 찾아가 서 볼 수 있는 글이 아니다. 유마거사가 머무른 방에서 유마(維摩)의 마음으로 그 뜻을 넉넉히 되새긴 추사를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소개한다.
사방 열 자 유마의 방을 들여다보니
능히 900만 보살을 수용하고
3만 2,000개의 법석을
모두 들이고도 비좁지 않으며
또한 능히 발우에 담긴 밥을 나누어서라도
한량없는 많은 대중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겠도다.
어느 미술사학자가 “무르익을 대로 익어 필획의 변화와 공간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 없다”라고” 평한 그 글씨들이 은해사에 모여 가히 추사 글씨의 야외전시장이라고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은해사의 현판은 추사체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기준작이 된다. 당시 추사는 1848년 12월, 9년간의 제주도 귀향살이에서 풀려나 용산 한강변의 마루도 없는 집에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추사체는 바로 이때 완성되었다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이다. 제주도 귀양길에서 풀려나 이듬해 64세의 나이로 한양에 돌아온 추사는 2여 년 뒤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 사건에 연루돼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길에 오른다. 그 짧은 서울 생활 동안 쓴 작품이 은해사에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 추사의 글씨는 은해사의 그 자리에 달려 있지는 않다. 성보박물관에 주요 유물로 소장되어 현장의 감흥을 느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기대감은 결코 식지 않는다. 영천 은해사는 추사의 글씨들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스스로 뜻을 새기게 하는 체험활동의 도량(道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생각들이 은해사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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