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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박물관 이야기

인연을 잇는 나무와 칼의 명상처 경남 함양 이산책판박물관

by 뽀키2 2023.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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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의 덕유산이 상상 이상의 절경을 품고 이곳까지 뻗어 있는 줄 몰랐다. 한때 넘치는 젊은 패기를 주체 못 해 떠난 한 장인이 남덕유산 자락 함양 땅으로 20년 만에 돌아와 박물관 하나를 지어놓았다.

이산책판박물관
이산책판박물관

한국 기록문화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 책판(冊版)을 연구하고 복원하기 위해 2014년 10월에 개관한 국내 유일의 책판박물관 ‘이산책판박물관’이다. 이산(以山) 안준영 관장이 직접 복원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고려대장경, 훈민정음 언해본,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최초의 문헌인 용비어천가 등 문화재급 책판 약 1,000여 점과 함께 고서 표지를 장식하는 능화판·고판화·고서(古書)·민화·시전지·제작 도구 등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복원 인출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복원 인출본

목판에 글자를 새겨 책을 인출하기 위해 만든 판목(板木)인 책판에는 경전을 찍기 위한 경판(經板), 사서삼경을 찍기 위한 경서판(經書板), 다라니를 찍기 위한 다라니판(陀羅尼板) 등이 있고, 그 외에도 글씨를 찍기 위한 판목인 서판(書板)과 그림을 찍기 위한 판목인 도판(圖板)이 있다. 책판 외에도 수장고와 복원실·교육실·전시실 등이 잘 갖춰져서 책판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관람을 넘어 전통 인쇄문화에 대해 경험하고 많은 지식을 얻어갈 수 있다.
안 관장은 자신을 이렇게 정의했다. “그림을 새기는 사람은 목판화가, 글씨를 새기는 사람은 목판각가로 나누어서 지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목판서화가입니다.”

안준영 관장이 복원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인출본
안준영 관장이 복원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인출본

뒤집어진 허공을 파내야 온전한 글씨가 드러나 보이는 판각의 이치. 감춰진 획들을 심안으로 찾아내는 돋을새김을 하고, 돌아누운 글씨들이 먹물을 머금고 마침내 종이 위에서 반듯하게 눈뜨기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수고로움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인본(印本)으로 전해오는 것을 다시금 피가 돌게 만드는 작업은 새로운 창작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까지. 그는 “역사를 되살리고 조상의 지혜를 잇는 뜻깊은 작업”이라며 치목에다 판각·마구리쇠·먹물제조·종이·인경에 이르는 일련의 공정을 ‘도 닦듯’ 해내고 있었다.

전시장
전시공간

그냥 목판에 칼을 갖다 댄다고 글씨나 그림이 되는 건 아니다. 각판의 특징과 판식을 분석하면서 칼을 밀어내는 추각법, 칼을 당기는 인각법, 산맥의 준봉을 이어가듯 깊고 얕게 파내는 타각법, 그 어느 방법이든 결코 책판에 담겨질 진리를 훼손하지 않는다. 새벽 3·4시경 일어나 향을 사르며 시작하는, 수행에 다름없는 그의 일과는 “글자를 새기는 게 아니라 부처님 말씀을 한 자(字) 얻는 거”라며 이름 모를 당시의 각수와 대화하듯 환희심을 낸다. 그가 가장 자부심을 갖는 작품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고려초조대장경의 ‘어제비장전 변상도(御製秘藏全 變相圖)’ 복원품이다. 각수의 기운이 절정에 오른 듯 그 유려함을 어디에도 비길 데 없이 그의 마음에 꼭 들게 된 이 복원은 초조대장경 조성 천년을 기념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지금은 1232년 몽골군 침략으로 초조대장경이 소실된 사찰인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되었다

안준영 관장
판각을 마무리한 경판을 들어 보여주는 안 관장

이산책판박물관은 책판 복원에 몰두하고 있는 안 관장과, 그와 뜻을 함께 하며 도제로서 무량한 공덕을 쌓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혼이 담긴 곳이다. 전통문화의 ‘복원’을 바탕으로 재생산되는 ‘창작’은 전통문화를 살아 뛰게 하는 힘이다. 그 절정의 생각들이 큰 힘이 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누군가는 민족의 문화는 계몽과 신화 사이에 걸려 있다고 했다. 계몽과 신화 사이의 긴장을 꿰뚫어 보는 역사란 기록으로 존재하는 법이다. 중국 법난의 시대에 천주(泉州)에서 경전이 결집되고, 몽골의 병화가 국토를 유린하던 고려시대에 남해에서 재조대장경이 탄생했듯이, 환란의 시대는 그 어떤 각수의 팔뚝에 힘을 솟게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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