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치악산을 바라보며 달리다 꺾어져 좁은 산길로 접어들어 올라서면 닿는 곳, 해발 600m 높이의 아늑한 터에 명주사가 있다. 저 멀리 감악산을 마주하고 뒤로 치악산 매봉을 두른 절집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벌써 마음자리가 편안하다.
1998년 창건이니 불과 20년 남짓, 그래서일까? 대웅전과 경내 석탑, 그리고 불상들이 서로 친구같이 잘 어우러진 이 절집은 전통의 굴레를 훌훌 털어버린 듯 너와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다. 게다가 동서양 고판화 수천 점을 소장한 우리나라 유일의 고판화박물관이 여기에 있다. ‘치악산 명주사 고판화박물관’, 친숙한 분위기의 로고는 유명 판화가 이철수의 솜씨이다. 불교미술을 전공한 것도 모자라 최근 한양대에서 박물관교육학 박사학위까지 받은 명주사 주지이자 고판화박물관 관장인 한선학(韓禪學) 스님의 열정이 사찰과 박물관 구석구석을 달구고 있다. 전 세계를 다니며 부처님 말씀이 어디 버려져 있지는 않은지, 땔감이나 장신구함 따위로 변해 버리지는 않았는지 살펴오다 차츰 눈이 밝아졌다. 이젠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문(沙門)의 신념을 실천하는 현장을 진두지휘하게 됐다.
2004년 처음 문을 열어 이제 연간 1만여 명이 찾는 이곳은 한국은 물론 인도·일본·중국·몽골·티벳·네팔에서 가져온 고판화, 목판인쇄 서적, 판화 등 2,500여 점 소장품으로 한국 최대 판화박물관을 굳건히 지탱하고 있다. 고려시대 때 제작된 화엄경 변상도(變相圖) 목판, 갖가지 문양을 찍어내던 능화판(菱花板), 편지지에 난초·파초·수선화 무늬를 찍던 시전지(詩箋紙)판, 새해 아침에 붙이던 호작도(虎雀圖) 목판, 목판 삽화가 실린 서적 등 다양한 유물들이 중국·일본·티벳·몽골의 고판화와 함께 전시되어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비교해 볼 수 있게 한다.
정교함이 동판화의 세밀함을 능가하는 티벳의 나한도, 퇴계 선생의 ‘성학십도’ 목판각과 왕실잔치 기록인 ‘진찬의계(進饌儀軌)’ 목판각 등은 박물관이 손꼽는 문화재급 소장품이다. 일본 교토 지온인(知恩院) 소장의 고려 불화 ‘오백나한도’를 모본으로 19세기에 만든 걸로 추정되는 일본 목판화 초판 인출본 또한 오백나한과 산수가 함께 표현된 보기 드문 예이기에 놓쳐서는 안 된다. 관람객들은 그저 보는 데서 나아가 판화감상에 판화 만들기 체험도 할 수 있고 스님과 함께 차를 마시며 판화에 얽힌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다. 고판화를 모으게 된 사연을 묻는 말에 스님은 “유물도 생명이 있어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게 되어 있다”로 대답한다. 이어 “집착이 없다면 버림의 의미도 모르는 것”이니 “집착과 희열을 나눔과 보시로 바꾸려는 것”이라 했다.
스님은 “유물이 지닌 수많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전통에 뿌리가 닿은 새로운 이야기를 엮어낼 수 있어 박물관과 친해진다”며, 방문객들에게 망가진 유물 하나를 보여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인 조선시대 정조 때의 〈오륜행실도〉 목판이 ‘일제강점기에 화로로 만들어 쓰느라 훼손돼’ 구두닦이 통처럼 되어 있었다. ‘참다운 인생을 살며 태평성대를 염원’했던 정조 임금의 간절한 뜻이 이렇게도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박물관을 벗하는 것은 종교에 다가가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알겠다. 신해 행증(信解行證)의 경계를 열고 넘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 문턱마다 들려오는 질문들을 기억한다. 믿음이 열쇠인가, 지혜가 열쇠인가. 고판화박물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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