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는 재앙인가, 축복인가. 디지털 시대의 우리는 너무나 많은 ‘선택’에 지쳐 있다. 내색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에 소외되어 버리는 것이 나을 것만 같은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다. 늦은 밤, 마지막 버스가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나’를 지나쳐 내달려 버리는 암담함이랄까.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 : 정보격차)가 큰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지식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가치 있는 정보를 찾기란 오히려 어려워졌다고들 말하는 걸 보니, 정보 부족의 시대에서 정보 과잉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란 은유는 엄청난 반어(反語)가 아닐 수 없다. 정보가 많아진다는 말은 그만큼 이용하기 힘들어진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이젠 ‘디지로그 사수(死守)’라는 것도 더 이상 핑계 삼을 수 없는 한물간 도그마에 지나지 않는다. 넘쳐나는 정보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불안감, 그러면서도 정작 필요한 것은 찾지 못하는 답답함은 디지털 시대의 딜레마가 아닐까? ‘사람들은 초고도 산업 사회의 딜레마인 ‘과잉 선택’의 희생자가 될 것’이라던 앨빈 토플러의 경고가 현실이 되어버린 지는 이미 오래다. 이즈음 ‘인터넷이 인간의 활동을 투명하게 만든다’고 말한 일본의 IT 저널리스트 사사키 도시나오(佐々木 俊尙)는 정보 폭주의 시대에 과도한 정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현대인에게 매우 쓸모있는 통찰력을 제안한다. 바로 ‘큐레이션(Curation)’이다. ‘과잉’의 문제를 이 ‘큐레이션’을 통해 해결하려는 시도가 강력한 설득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의 책을 읽고서 ‘디지털 디바이드’의 불안을 떨치지 못한 사람들이 디지털 시대를 헤쳐가는 좋은 방법 중 하나를 ‘큐레이션’이라고 믿게 되었다. ‘큐레이션’은 ‘돌보다’라는 뜻의 라틴어 ‘쿠라(cura)’에서 유래한 말로,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콘텐츠를 목적에 맞춰 가치 있게 구성하고 퍼트리는 일’을 뜻한다. 이 말은 문화소비자인 우리에게는 비교적 익숙한 말이다. 또 우리의 일상을 압도하는 과도한 정보를 솎아줌과 동시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생태계를 만드는 걸 이르기도 하는데, ‘어제 유용한 정보가 오늘도 유용하다고는 할 수 없다. 나에게 유용한 정보가 당신에게 유용하다고는 할 수 없다. 정보에 보편적인 가치는 없다’는 선언(?)처럼 다가온다는 것도 우리는 짐작하고 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마이클 바스카(Michael Bhaskar)는 큐레이션을 ‘불필요한 것을 과감히 덜어내는’ 힘이자, ‘시장이 원하는 것만 가려내는’ 기술을 넘어, ‘과잉된 정보를 과감히 덜어내고, 새롭게 조합해 또 다른 가치를 창출하는 일’로 새롭게 정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신뢰, 공감, 배려가 없는 큐레이션은 한낱 허세에 그치고 말 것’이라고.
디지털 세계에서도 가치 있는 정보를 얻는 데는 길라잡이가 분명 필요하다. 문화소비자라면 갖추어야 할, 알뜰살뜰한 덕목 같다는 느낌이 드는 큐레이션은 일상을 압도하는 콘텐츠 과잉 속에 ‘인간’이라는 필터 하나를 더 끼워 콘텐츠의 가치를 더하려는 노력인지도 모른다. 이런 노력이라면 정보의 홍수가 빚는 ‘결정장애’는 사라지고, 세상은 더 명료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냄새가 나는 정보를 만들려면 인간의 손을 거친 큐레이션이 필요하다. 기계적인 알고리즘은 대량의 정보를 수집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그 정보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그래서인지 큐레이션에는 은근히 인문학적 느낌이 든다. 사람의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자신의 취향이 잘 반영될 것 같은 느낌과 ‘디지털 아멘’이라는 ‘좋아요’에 현혹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느낌마저 든다. 과거부터 존재했지만 디지털 시대인 오늘날 그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진 것 같은 큐레이션. ‘웨이와이어닷컴’의 수석 큐레이터인 스티븐 로젠바움(Steven Rosenbaum)의 이 한마디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만들어내는 것(크리에이터)보다 있는 것에서 중요한 걸 가려내고, 목적에 맞게 의미를 덧붙여 다시 퍼트리는 것(큐레이션)이 더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그런 눈물겨운 느낌.
분명한 것은 큐레이션을 또 큐레이팅하게 되는 알고리즘에 시달리는 시간이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세상은 빠르게, 보다 다양한 취향과 문화가 공존하는 생태계를 구축하며 변해갈 것이다. 영국 서펜타인 갤러리의 디렉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는 ‘과거와 현대의 예술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큐레이터는 예술가와 공생관계를 맺고, 도전하며, 탐구한다’ 말했고, 영국정부아트컬렉션의 선임 큐레이터인 애드리언 조지(Adrian George)도 ‘문화생산이 급속도로 확장되는 오늘날, 큐레이터는 문지기의 역할을 한다’고 말한 그들의 ‘큐레이터론(論)’에 자못 안심한다.
더 많은 사람, 더 많은 자원,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생산을 원하는 시대가 거침없이 지나가고 있다. 분명한 것은 더 유용한 정보를 ‘어떻게 골라낼 것인가’, 더 큰 가치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를 묻는 시대는 ‘큐레이션 하거나 도태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디바이드’처럼 불안하지는 않다. 이런 편안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든든한 ‘큐레이션’은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는 뜻이리라. 자신이 부끄럽지 않은 문화소비자라면 ‘나도 쓸모 있는 큐레이터!’라 한번 다짐해보라.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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