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국의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Ray Oldenburg, 1932~2022)가 말하는 ‘제3의 장소’가 ‘박물관’이기를 꾸준히 기대하는 편이다. 아무 일 없었던 이 ‘제3의 장소’에도 디지털 시대를 기다리면서 ‘암중모색’했던 시간들이, 이제 ‘기어코 올 것’이 되어 성큼 와버린 것이다. 꿈에서 깨인 듯, ‘점잖은’ 박물관으로 척화비 같은 배수진을 칠 것인가, 통찰력 넘치는 새로운 풍속도를 그려나갈 것인가. 결코 적잖은 고민에 휩싸인다. 어느 분은 ‘디지털 ‘문명’은 풍요로워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들을 디지털 ‘문맹’으로 전락 시킨다’고 겁을 주고, 어느 분은 ‘기술 발전과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지만, 그걸 걷어내려면 변화의 본질을 읽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고 무겁게 등을 토닥였다.
『박물관과 디지털문화』(Museums and Digital Culture)는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의 툴라 지아지니(Tula Giannini)교수와 런던 사우스 뱅크대학의 조나단 P. 보웬(Jonathan P. Bowen)교수가 함께 펴낸 책이다. 신발끈을 고쳐 매는 기분으로 이 책을 들여다보니, 박물관과 관련된 디지털 문화의 발전에 관해 얘기하면서, 디지털 문화가 21세기 박물관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디지털 문화가 박물관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증을 많이 풀어주고 있다.
박물관은 디지털시대를 어떻게 지나가고 있을까. ‘가만있지는 않았을 텐데’하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새 소식이 되겠지만, 속도감을 보여주며 변하고 있는 박물관에게는 이만저만 큰 고통의 나날이 아닐 수 없다. 디지털 기술과 그것의 역동성은 어쩔 수 없이 박물관의 오랜 관행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소셜 미디어의 세계적 확산과 함께, 박물관 관객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아진 까닭은 물리적 공간에 있든 없든, 능동적인 참가자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디지털 기술이 박물관을 어느 정도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심지어 그 ‘변화’란 것이 박물관이 따라야 할 올바른 길인지도 몰랐거나 모른 척 했다. 몇몇 박물관이 방문객들과 대화할 수 있는 것을 대안으로 삼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장품과 수집품, 전시회 및 프로그램을 ‘막연하지만’ 디지털에 적용하도록 은근히 강요받았을 뿐이다.
지금 세계의 박물관들은 다양한 커뮤니티와 더불어 매우 역동적인 기관으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사회적, 문화적 변화는 주로 예술에서 온다는 신념은 그대로 간직한 채, 디지털은 박물관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비전을 만들어냈다. 디지털 문화와 디지털 미학이 완벽한 통합을 이루면서 혁신적인 미래의 박물관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데,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는 세평을 얻으면서 관람객 중심의 체험으로 관람객을 사로잡고, 디지털 컬렉션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향으로 우선순위가 바뀌고 있다.
많은 박물관들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신중하게들 도전하면서, 결국은 디지털적인 사고와 전략을 요구하는 전환점에 도달할 거라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부쩍 커져버린 관람객의 디지털 의식과 박물관의 정체성 사이의 어쩔 수 없는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두려움 없이 나아갈 것인가. 이 애매한 일감을 세계 도처의 박물관들이 안고 있다.
세계의 박물관은 이제 디지털 미디어로 현실화된 새로운 공간을 작게나마 주도하고 있다. 그리고 현장과 온라인에서 박물관과 커뮤니티를 통합하면서, 디지털 생태계에서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디지털 장치는 인간의 소리를 내는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하고, 로봇은 사람처럼 보이고 행동하며, 우리는 디지털이라는 ‘듣보잡’ 렌즈를 통해 예술을 보는 것처럼 변화된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디지털 현실을 변형하고 모방하는 우리는 몰입형 경험을 할 수 있는 디지털 아트를 통해 거부할 수 없는 디지털의 존재를 더욱 현실화시킬 것이다. 분명한 것은 멈출 수 없는 디지털의 힘이 박물관의 중심부로 들어가면서 엄청난 변화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두려움도, 애매함도 느끼지 말고, 이제 ‘제3의 공간’ 박물관으로 들어가자.
단, 아래의 두 가지 사실에는 결코 망설이지 말기를. 한 번에 일을 처리하는 멀티태스킹(multitasking)이 실제로는 뇌 기능을 망친다는 ‘배부른’ 연구 결과와, 공감과 감정을 조절하는 뇌 피질의 위축방지를 위해 한 가지 것에 집중하는 모노(mono)태스킹을 권하는 으름장에도 굴하지 말 것이며, 2차 산업혁명이 IQ를, 3차 산업혁명이 EQ(감성지능)를 낳았듯이, 4차 산업혁명에서 교육의 핵심은 디지털 지능(DQ)에 있다면서, ‘더 슬프고, 더 외로운 디지털 세대가 디지털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다는 ‘헛된 희망 고문’에도 담담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말 한마디. “오늘을 이해하고 싶다면, 어제를 살펴봐야 한다. If you want to understand today, you have to search yesterday.” 박진주(朴眞珠)란 한글이름을 가진 작가 펄 벅(Pearl S. Buck. 1892~1973)이 마치 박물관 홍보대사처럼 남긴 말이다. 나는 이 말씀 뒤에 문득 한 시인의 시(詩句) 하나를 빌려 비틀어 본다. ‘박물이여, 너는 눈부시지만 우리는 늘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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