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적인 아날로그시대가 분별적인 디지털시대로 변하면서 인간의 생활방식이 변했다. 미분방정식을 풀어야하는 시대가 지나고 그냥 바로 수치계산만 하면 되는 시대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숙련도의 차이로 발생한 디지털 디바이드가 선명해져 이제는 모두가 디지털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정보기술은 스스로의 관성으로 발전해왔고, 이런 걸 기술 푸시(Technology Push)라고 한다는데, 그 물리적 힘을 얻었던 시대에서 인간의 사고능력까지 변화시키는 단계까지 왔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과학발전의 관성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나는 이런 변화가 언젠가부터 불쑥 끼어든 아트 푸시(Art Push)의 영향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콘텐츠란 이름으로 우리 앞에 등장한 갖은 트렌드가 향유의 대상을 넘어 소비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소비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다. 옛말 그른 것 하나 없다. <손자병법>에도 ‘졸속(拙速)이 지완(遲緩)을 이긴다’ 했다.
우리는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데도 세상을 보는 눈은 왜 이렇게나 다른 걸까? 역설적이게도 디지털 기술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연결해주는 동시에 세상에 대한 시야를 좁히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만이 똘똘 뭉치게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살면서 넘어야 할 산도 많고, 물리칠 것도 한 둘이 아니다. 턱하니 들어앉아버린 디지털시대에서 경계인이 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리해보자면,
먼저, 정보가 많은 사람이 오히려 최악의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이걸 정보편향(information bias)이라고 하는데, 어떤 편향성이라도 가랑비처럼 우리의 마음을 적셔 진짜와 가짜를 알아차리는 능력을 손상시킨다. 이 양극화된 현실이 피 튀기는 경쟁을 벌이는 덕분에 누군가는 입맛에 딱 맞는 현실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구축해나가는 거다. 그러니 ‘정보가 많을수록 더 나은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는 그 믿음은 틀렸다.
두 번째, 사람들은 논리적 분석이나 사실에 근거해 판단을 내려야 할 때조차 과거의 경험이나 직관, 심지어 ‘섬광기억’에라도 기대어 판단을 내린다. 노벨상을 수상한 천재 심리학자이자 행동경제학자인 다니엘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이 현상을 ‘휴리스틱(heuristic)’이라고 불렀다. 선택은 곧 누군가를 믿고 나머지를 불신한다는 의미다. ‘나는 합리적인 인간’이라는 착각을 떨쳐버리는 것이 중요하므로 단호하게 판단해야 한다.
세 번째, ‘나는 특별한 존재’라는 믿음이 때로는 자신을 망치는 걸 두고, 학문적으로는 ‘허구적 독특성(false-uniqueness effect)’이라고 한단다. ‘자기능력에 대한 과대평가’를 일종의 ‘자기기만’이라고 보는 것이다. 사회학자 에드워드 밴필드(Edward Banfield)는 1954년 이탈리아의 한 낙후된 마을에서 주민들이 강한 출세욕을 드러내는 걸 보았다. 그는 그 욕망을 시대착오적인 자민족 중심주의라고 규정하며, 어떤 구성원들이라도 서로를 신뢰할 때 발전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말 안해도 날 알아주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가면증후군(imposter syndrome)’일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유능한 사람이 자신이 실제로 무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라 걱정하는, 예측불가능한 심리상태를 말한다. 신뢰가 있는 사회의 구성원은 더 건강하다. 신뢰는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남(Robert Putnam)이 말하는 ‘사회적 자본’의 핵심 요소이기도 한데, 이때 ‘사회적 자본’이란 활기찬 사회를 위한 인맥의 넓이를 말한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정보편향, 휴리스틱, 허구적 독특성, 가면증후군이라는 이름의 중병을 앓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에겐 쉼표가 필요하다>의 저자이며, 캐나다의 사회평론가인 마이클 해리스(Michael Harris)는 끊임없는 연결의 시대에 한가로울 자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혼자 생각하는 인간의 시간을 신기술이 없애버리는 문화를 만들고 있다고 우려하면서 그 시간이 공격받는 것은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 고독이 주는 세 가지 혜택(새로운 아이디어, 자신에 대한 이해, 타인에 대한 친밀감)으로 예술이 자라난다는 것은 누가 가르쳐줄 수 있을까.
고독과 다르지 않는 침묵의 문제점은 침묵하는 이유를 목청 높여 말할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침묵은 쌓이고, 증폭되고, 우리의 의도 밖으로 자체의 생명을 얻어 무관심이나, 회피나, 심지어 수치심으로 잘못 해석될 수 있으며 결국 이 침묵은 망각으로 이어진다. 세계가 지식정보사회로 변해가면서, 그 와중에 선진IT강국이 된 한국에서 일어난 IT격차가 독특한 침묵의 디지털 디바이드를 만들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잔칫집에서 부엌일을 도와줄 때 아이를 달고 가 남모르게 먹을 것을 챙겨주는 걸 “남모르게 틈틈이”란 뜻의 우리말로 “‘구메구메’ 먹여준다”라고 한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외치면서도, 가랑비에 옷 젖으면서도 우리는 디지털의 길을 가고 있다. 오! 구메구메 디지털이여! 조금 불편할 뿐이라며 우리는 오늘도 가고 있지 않는가!
'디지털시대의 문화현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⓲ ‘큐레이션’curation - 덜어내고 골라 먹는 힘 (0) | 2024.02.12 |
---|---|
⓱ 박물(博物)이여, 너는 눈부시지만… (0) | 2024.02.12 |
⓯ 빅테크와 동행하는 예술 (0) | 2023.09.04 |
⓮ 아프신지? 저도 아픕니다 (0) | 2023.08.07 |
⓭ ‘디지로그’로 안심하는 AI시대 (0) | 2023.07.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