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그 ‘지적 애매함’

4차 산업혁명, 그 ‘지적 애매함’ 1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우리의 일상을 덮치고 있다고 난리들이다. 3차 산업혁명의 절정일 뿐 4차 산업혁명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람들도 시끌벅적, 그 수가 적지 않다. 현란한 용어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유독 우리의 귓전을 맴도는 단어들이 있다. 바로 통합, 융합, 복합, 통섭, 하이브리드 같은 말들이다. 정치인의 연설문부터 기업 CEO의 신년사, 대학의 통폐합 공고문에 이르기까지 이 단어들은 마치 모든 문제의 해결사처럼 쓰인다. 하지만 정작 그 뜻을 명확히 구분하여 쓰는 이는 드물다. 대충 섞이면 ‘융합’이고, 좀 더 그럴싸해 보여야 하면 ‘통섭’이라 부르는 식이다. 이러한 ‘지적 애매함’은 사회적 소통 비용을 높이고 본질을 흐리며, 결국에는 겉치레만 요란한 빈 수레를 양산해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수사학이 아니라, 이 혼탁한 개념들의 제자리를 찾아줄 냉철한 정의(定義)다.

최근에는 이 애매한 개념들을 과학적 해법에 비유하여 구분하는 매우 흥미롭고도 탁월한 견해가 자주 인용된다. 통합은 물리학적, 융복합은 화학적, 하이브리드는 유전학적, 통섭은 생물학적 해법이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각 용어가 가진 본질적 속성을 과학의 원리에 빗대 설명함으로써 안개 속에 갇혀 있던 경계를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가장 먼저, 우리가 흔히 ‘통합’이라 부르는 개념은 ‘물리학적 해법’에 해당한다. 기계 장치에서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듯, 각 요소는 고유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한 채 하나의 목적을 위해 물리적으로 결합한다. 통제와 관리를 위한 기계적 결합, 이것이 바로 통합이며, 영어로는 명확하게 ‘인테그레이션(Integration)’이라고 쓴다.

반면,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라 불리는 ‘융복합’은 ‘화학적 해법’이다. 서로 다른 요소들이 만나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제3의 가치를 창출하는 현상으로, 물리적 ‘혼합’과는 차원이 다르다. 예술과 기술이 만나 미디어아트를 탄생시키는 거라면 이해가 빠를 것 같다. 간혹 퓨전(Fusion)이나 멜팅(Melting)같은 단어와 혼돈해서는 안된다. ‘혁신을 이룬다’는 뜻의 ‘컨버전스(Convergence)’가 가장 적확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하이브리드(Hybrid)’는 무엇인가. 이것은 ‘유전학적 해법’이다. 당나귀와 암말의 교배로 노새가 태어나듯, ‘잡종강세’를 만드는 것이다. 내연기관과 전기모터가 공존하는 하이브리드 자동차나, 클라우드를 섞어 쓰는 하이브리드 클라우드가 대표적으로, 두 가지 성질이 공존하며 기능적 시너지를 내는 상태를 말한다. 어원적으로는 ‘잡종’의 의미지만, 현대 기술 사회에서는 ‘고효율의 복합체’라는 긍정적 의미로 격상되었다.

한국지성사에서 융합의 용어와 관련해 가장 뜨거웠던 논쟁은 단연 ‘통섭’을 둘러싼 번역논쟁이었다. 
(좌로 부터) ‘컨실리언스(Consilience)’라는 용어를 만든 19세기 영국의 자연철학자 윌리엄 휴얼, 현대에 와서 그 의미를 되살린 미국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그리고 ‘통섭’으로 번역하여 한국에 소개한 최재천교수.
한국지성사에서 융합의 용어와 관련해 가장 뜨거웠던 논쟁은 단연 ‘통섭’을 둘러싼 번역논쟁이었다.
(좌로 부터) ‘컨실리언스(Consilience)’라는 용어를 만든 19세기 영국의 자연철학자 윌리엄 휴얼, 현대에 와서 그 의미를 되살린 미국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그리고 ‘통섭’으로 번역하여 한국에 소개한 최재천교수.

마지막으로 ‘통섭’은 ‘생물학적 해법’이자 철학적 관점이다. 이는 유기적으로 연결된 생태계처럼 학문의 거대한 줄기를 꿰뚫는 통찰이다. 지식의 근본 원리를 찾아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를 허물고 거대한 지식의 대통합을 이루려는 시도, 이것이 바로 ‘통섭(Consilience)’이다. “함께(con) 뛰어오른다(salire)”는 라틴어 어원처럼, 서로 다른 분야가 만나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용어들이 맥락 없이 남용될 때 발생한다. 학문적 엄밀성 없이 권위에만 기대어 대중을 현혹하는 지식인들의 허위, 즉 ‘지적 사기(知的 詐欺)’에 휘말릴 수 있다는 점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4차 산업혁명판 지적 사기’가 횡행한다. ‘단순한 물리적 결합’을 놓고 거창하게 ‘융복합’이라 포장하거나,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를 한 방에 모아 놓기만 하고는 ‘통섭’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옳지 못한 일이다. 이와 대조적인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예술은 고등 사기다”라고 일갈한 바 있지만, 백남준의 ‘사기’는 지식인들의 허위를 비판한 ‘기만’과는 다르다. 백남준의 사기는 고정관념을 깨고 대중의 인식을 뒤흔들어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예술적 충격요법이었다. 그는 기술(TV)과 예술(Art)을 진정으로 ‘컨버전스(Convergence)’하여 전위적인 가치를 만들어 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백남준식의 창조적 파격이 아니라,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지적 허영이다. 용어를 쓴다고 해서 혁신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혁신이 일어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용어가 존재해야 마땅한 것이다.

한국 지성사에서 융합의 용어와 관련해 가장 뜨거웠던 논쟁은 단연 ‘통섭’을 둘러싼 번역 논쟁이었다. 윌리엄 휴얼이 만들고, 에드워드 윌슨이 되살려낸 ‘컨실리언스(Consilience)’를 최재천 교수가 번역해 한국에 소개했다. 최교수는 고심 끝에 원효대사의 화쟁 사상 등에서 유래한 ‘통섭(統攝)’이라는 한자어를 선택, 번역했다. “큰 줄기를 잡다(統)”, “모든 것을 다스린다(攝)”는 뜻이다. 쉽지 않았다. 일부 인문학자들이 과학만능주의에 기반한 또 다른 형태의 ‘지적 사기’라며 맹비난했고, 차라리 ‘서로 통하고 건넌다’는 의미의 ‘통섭(通涉)’을 썼어야 했다는 대안이 제시되기도 했던 이 논쟁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측면은, 이 소란 덕분에 한국 사회가 학문 간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멋지게 큰일을 한 것이다. 진정한 통섭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함께 뛰는(Jumping together)’ 것이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이 요구하는 융합 인재 역시 기술을 도구로 인문학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기술의 언어로 인문학적 가치를 구현하는 자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말의 성찬 속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융합은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자기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경계를 지우되, 각자의 빛을 잃지 않는 상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해야 할 융합의 종착지가 아닐까. 우리는 이제 신중해야 한다. 시스템을 연결할 때는 ‘통합’이라 하고, 이종 간의 결합으로 혁신을 꾀할 때는 ‘융복합’이라 하며, 기능적 효율을 위해 섞을 때는 ‘하이브리드’라 부르고, 학문의 경계를 넘어 거대한 지혜를 모색할 때는 ‘통섭’라고 하자. 명칭이 정확해야, 생각도 분명해진다.

4차 산업혁명이 온다 해도, 그것은 기술의 혁명이기에 앞서 인식의 혁명일 것이다. 물리적 결합을 넘어 화학적 융합으로, 그리고 마침내 생물학적 통찰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스스로의 ‘지적 애매함’을 걷어내고 미래로 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융합은 사기(詐欺)가 되지만, 치열한 융합은 사기(史記)가 되어 역사로 남을지 모른다. 여러분이 맞닥뜨리는 그 융합은 지금 어떤 역사를 쓰고 있는가. 지금, 가면을 벗고 본질을 마주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