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시대 도자기를 굽던 사옹원(司饔院)의 분소인 분원(分院) 가마터, 뜨거운 열기가 가시지 않은 가마 안에서 갓 꺼내진 도자기들은 저마다 눈부신 자태를 뽐냈을 것이다. 도공의 땀과 흙의 기운, 그리고 불의 우연이 만들어낸 이 결과물들 앞에서 모두가 감탄하고 있을 때, 오직 한 사람만이 서늘한 눈빛으로 그릇의 결을 훑는다. 그는 도자기를 만드는 이가 아니다. 도자기를 ‘깨뜨릴 것인가, 남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자, 바로 파기장(破器匠)이다. 겉보기에 누군가에게는 귀해 보일 그릇일지라도, 파기장의 눈에 미세한 뒤틀림이나 정신의 결여가 발견되는 순간 그 그릇은 가차 없이 산산조각이 난다. 도공의 열망이 담긴 결과물을 한순간에 흙으로 돌려보내는 그의 행위는 잔인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 잔인한 파괴가 있었기에 조선의 백자는 오늘날까지 세대를 넘어 품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역 문화계에서 가장 필요한 상징적 존재를 하나 꼽으라면 나는 늘 ‘파기장’을 말해왔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결핍된 존재, 그리고 우리가 간절히 기다려야 할 존재가 바로 이 파기장이기 때문이다.
파기장은 단순히 그릇을 부수는 직업이 아니다. 그는 관영 사기 제조장인 사옹원에 소속된 관리였으나, 단순한 행정적 ‘제도’에 갇혀있지 않았다. 그는 유행을 읽되 유행에 휩쓸리지 않으며, 문화의 이름으로 포장된 관습과 편견을 가장 먼저 의심하는 자였다. ‘원래 그래 왔다’는 관성적 대답 앞에서 망치를 드는 사람, 그리하여 모두가 ‘만드는 법’을 이야기할 때 유일하게 ‘버리는 법’을 고심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파기장은 직함이기보다 태도이며, 권한이기보다 책임에 가깝다. 문화의 형식이 화려해질수록, 이 엄격한 감별사의 부재는 더욱 뼈아프게 다가온다.
오늘날 지역문화는 늘 사람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만으로는 문화가 성숙하지 않는다. 지역이라는 좁은 공동체 안에서 문화는 종종 ‘관계의 온기’라는 함정에 빠지곤 한다. 서로의 사정을 너무 잘 알기에, 혹은 갈등을 피하고 싶기에 우리는 부족한 결과물 앞에서도 쉽게 박수를 보낸다. “고생했으니 됐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의 온정주의는 문화의 하향 평준화를 불러오며, 결국 지역문화의 자생력을 갉아먹는다. 지역문화계에는 종종 열정은 넘치지만 시야는 좁은 사람, 배려는 있으나 기준은 흐린 사람, 경험은 많아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기획은 빠르지만 사람을 소모시키는 사람, 이름은 크지만 현장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파기장은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다. 그는 현장의 사정을 알되 현장에만 갇히지 않고,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되 그것을 박물관 유리장 속에만 두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는 선입견 없이 문화를 다루는 사람이다. 어떤 전통은 더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우월하다고 믿지 않고, 어떤 새로운 표현은 낯설다는 이유로 가볍게 치부하지 않는다. 문화 앞에서 먼저 결론을 내리지 않는 태도, 그것이 파기장의 가장 큰 덕목이다.
그에게 문화란 어느 집단의 전유물도 아니고 누군가의 실적도 아니다. 오직 공동체의 품격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실체일 뿐이다. 소신 있는 파기장은 필연적으로 불편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축제의 불꽃이 터지고 모두가 환호할 때, 그는 그 불꽃이 예산 낭비인지 혹은 진정한 문화적 정화작용인지를 묻는다. 그의 말은 서늘하고 아프지만, 파기장은 파괴를 위한 파괴를 하지 않는다. 그의 망치는 더 나은 그릇을 빚기 위한 ‘조정’의 도구다. 그는 타협이 필요한 지점과 원칙을 지켜야 할 지점을 정확히 구분하기에 진정한 파기장이 있는 조직이나 지역사회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당장의 비판은 쓰지만, 그 비판이 쌓여 신뢰의 단단한 지층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칭찬하는 사람보다 제대로 묻는 사람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 파기장의 부재는 곧 지역문화의 노화와 퇴행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파편들은 조선시대 도공들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백자를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잘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은 현대 문화 기획의 금언과도 같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디지털시대 화려한 형식의 새 부대들이 쏟아진다. 그러나 그 화려한 부대에 담길 ‘술’의 품질은 과연 누가 보증하는가?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그것을 해석하고 품격 있게 다듬어 줄 파기장의 존재는 더욱 절실하다. 기회는 많아졌지만, 오해는 깊어지고, 소통의 채널은 늘었지만, 진심은 더 전달되기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이다. 파기장은 새로움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으며 낡은 것을 무조건 폐기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 새 부대가 왜 만들어져야 하는지, 그리고 이 안에 담길 사람들의 얼굴이 누구인지를 먼저 살피는 사람이다.
문화의 본질은 결국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있다. 모든 문화 활동의 끝에는 한 사람의 영혼이 존재한다. 파기장은 그 영혼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이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빛날 수 있도록 불량문화의 찌꺼기를 걸러내는 필터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는 이제 요행이나 타협을 바라는 대신, 우리를 둘러싼 문화적 거품을 걷어낼 파기장을 찾아 나서야 한다. 대접받는 원로의 권위나 미디어의 화려한 수사 뒤에 숨은 본질을 보고, 기준과 표준을 벗어난 억지스러움을 경계해야 한다. 흔들림 없는 비평과 엄격한 기준을 통해 우리 문화의 표준을 세울 수 있는 인물을 발굴하고 그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파기장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초인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내면화해야 할 기준이자 자부심의 다른 이름일 지도 모른다.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나는 내 앞의 그릇이 불량임을 알면서도 침묵하고 있지는 않은가? 관계의 편안함 때문에 문화의 품격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파기장을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 엄격한 감별사의 눈을 갖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지역문화계가 진정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은 파기장의 자리가 분명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자리는 누군가를 권력으로 억누르는 자리가 아니라, 여러 목소리가 안전하게 만날 수 있도록 바닥을 다지고 부끄러운 결과물이 공동체의 이름으로 남지 않도록 막아서는 자리다. 선입견 없이 문화를 응시하고 소신 있게 진실을 말하며 그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 그런 파기장이 살아 숨 쉬는 지역은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뿌리가 뽑히지는 않는다. 우리를 둘러싼 불량문화의 그릇을 과감히 깰 수 있는 파기장은 과연 누구인가.
지금 우리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그릇을 고르고 있는 파기장의 망치 소리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그 소리가 들려올 때, 비로소 우리의 문화는 한 번 소비되고 사라지는 구경거리에서 시대를 넘어 남겨지는 유산으로 거듭날 것이다. 완성을 위해 파괴를 선택하는 그의 결단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문화의 자존심을 되찾아줄 유일한 열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