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에는 한때, 도시의 공기를 바꾸어 놓은 음악FM이 있었다. 무림제지가 운영하던 자체편성100% 음악전문방송 ‘한국FM’. 1980년 언론통폐합이라는 이름의 폭력 앞에서, 주파수 89.7MHz는 KBS 대구국으로 넘어갔고, ‘BBC 한국FM’이라는 이름도, 스튜디오도, 거기서 태어난 수많은 청취자의 기억도, 제도권 기록에서는 이제 거의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언론통폐합은 단지 몇 개 언론사의 간판을 바꾸는 행정개편이 아니었다. 동양방송, 동아방송, 전일방송, 서해방송, 그리고 한국FM 같은 민간 방송사는 강제 편입되거나 강제 지분 인수를 당했다. 64개 방송사가 18개로 줄어드는 동안, 전국 각 도시마다 쌓여가던 도시 고유의 감수성은 ‘국가’라는 이름의 편성표 아래 균질화됐다.
대구의 ‘한국FM’도 그 희생자 중 하나로, 그렇게 막을 내렸고, 남은 것은 기억뿐이다. 지금 50·60대에게 ‘한국FM’은, “그때 그 노래”, “그때 그 목소리”로만 호출되는 옛 추억일 뿐이다. 다만 궁금한 것은 당시 강제폐간된 잡지가 재창간이나 속간된 것과는 달리, 45년간 그 방송의 복권이나 부활을 진지하게 공론화하는 목소리조차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냥 한 때의 회상으로만 소비되기에는, 그 전파가 품은 지역성과 실험성의 밀도가 컸다는 점에서 더 씁쓸하다. 1990년대 말, 지역민영FM이 개국할 때, ‘한국FM’ 이야기가 잠깐 언급되긴 했지만 “돈의 논리” 앞에서, “가성비”라는 말 앞에서 쉬 밀려났다. 표면적으로는 ‘지역방송’인 대구지역 FM지형을 보면, 주파수도, 지역국도 여럿이지만 대부분 “최소한의 자체편성+서울발 중계”라는 안전한 공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대구는 FM채널이 적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가의 문제다. 지역의 축제와 기념일, 재난방송 등에는 각각 캐리어를 틔워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일심동체’ 미디어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방송사 입장에서 광고비, 인건비, 제작비를 계산하면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지만, 문제는 ‘이 도시가 어떤 도시인가’를 생각해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대구는 유네스코 지정 ‘음악창의도시’다. 2017년 음악분야 창의도시로 선정된 이후, 대구의 음악 DNA를 세계에 알리려 애써 왔다. 대구는 한국 최초의 근대 가곡 「동무생각」이 탄생한 도시이며, 가객 김광석의 거리가 조성될 만큼 대중음악의 감수성이 짙게 쌓인 도시다. 오페라하우스가 있고, 1000석이 넘는 여러 대형공연장들에서는 의욕적으로 매년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대구국제오페라축제(DIOF)’, ‘세계오케스트라 페스티벌(WOF)’, ‘대구국제재즈축제(DIJF)’ 등이 치러지는 도시다. 이렇게 음악적 자산이 다층적으로 겹친 도시에, 놀랍게도 “음악도시의 얼굴”이라 부를 만한 100% 자체편성 음악전문 FM방송 하나가 없다. 이쯤 되면 단순한 시장 논리가 아니라, 기획 부재라고 봐야 한다. 이미 FM채널을 하나 가지고 있는 어느 대구지역 방송사에서 ‘지역민영방송에 대한 국가차원의 지원책으로 FM주파수를 하나 더 가질 수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하지만 ‘채산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켜하지 않는다’고 전해졌다. 여기서 묻고 싶어진다. 과연 라디오의 채산성을, 지금까지 ‘서울 프로그램을 싸게 수중계하고, 광고는 전통적인 방식으로만 파는’ 재래식 모델에만 가둬 놓고 계산해 온 건 아닌가. 디지털 환경을 전제로 한, 멀티플랫폼·멀티롤 기반의 운영 모델을 제대로 실험이나 해봤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의 라디오는 ‘주파수 장사’만이 아니다. 앱으로 국경 밖까지도 가청권을 확장할 수 있고, 팟캐스트·유튜브 클립·SNS 숏폼과 연동해 프로그램 IP를 재활용할 수 있다. 지역콘서트·뮤지컬공연·여러 페스티벌과 연계한 티켓·굿즈 판매, 로컬 브랜드와 결합한 브랜디드 콘텐츠, 크라우드 펀딩형 프로젝트도 가능하다. 광고 역시 개별 미디어랩, 지역 광고대행사, 디지털 애드네트워크 등을 통해 다양하게 수주하는 시대다. 그런데도 ‘안된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상상력조차 고갈된 것이다. 사실 ‘한국FM’은 그러한 상상력이 어느 정도 구현되었던 시기의 산물이었다. 지역기업이 직접 라디오를 운영하며, 도시의 감수성을 담은 100% 자체편성 음악FM을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그렇다. 지금 우리가 ‘정답’처럼 받아들이는 공영·민영 이원 구조, 중앙집중형 편성시스템은 1980년 언론통폐합 이후 만들어진 것이지, 어떤 영원한 규범이 아니다. 그러니 ‘한국FM’을 단지 ‘옛날 향수의 대상’으로만 보는 대신, ‘민간+지역+음악 전문성’이 결합했던 하나의 모델로 다시 불러낼 필요가 있다.

이곳은 음악적 유산, 축제, 창작, 교육 등을 통해 지역 사회와 경제를 활성화하는 도시들로, 음악 산업과 문화적 활력을 통해 도시 발전을 도모하는 네트워크의 일원으로, 한국에서는 통영(2015)과 대구(2017)가 지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금 대구에서 가능한 역발상은 무엇일까. 먼저, “도시형 공공라디오”라는 개념을 꺼내볼 수 있다. 방송국 자체에서 채산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시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이다. 문화도시 조성예산의 일부를, 단기 행사나 축제에만 쓰는 대신, 도시의 음악과 문화를 퍼 올리는 FM채널에 일정부분 투자하는 것이다. 대구가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로서 받는 국제적 주목도, 이런 상설 플랫폼이 있을 때 훨씬 실감나게 시민과 연결될 수 있다. 그다음은 ‘시민 공모주+전문 위탁 운영’모델이다. 오너쉽은 허가를 받은 방송국이, 운영은 음악협회, 음악페스티벌조직위 같은 전문음악·문화단체가 맡는 방식이다. 시민들이 일정 금액을 공모주 형식으로 출자해 ‘음악도시FM’을 공동 소유하고, 이익금은 사회환원 또는 프로그램 제작비로 재투자하는 이 구조는 청취자를 곧바로 ‘공동 책임자’로 편입시키는 장치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멀티롤 인재+디지로그 운영”이다. 한 사람의 PD가 기획, 진행, 편집, 온라인 배포, 커뮤니티 운영까지 맡는 형태는 이미 팟캐스트·유튜브에선 보편적 모델이다. 새로운 FM채널이라면, 일부 시간대를 이런 크리에이터에게 과감히 맡겨볼 수 있다. 편성의 안전성보다, 다양성을 먼저 택하는 것이다. AI 추천 알고리즘과 데이터 분석을 활용해, 어느 시간대에 어떤 장르가 실제로 호응을 얻는지 실험해 보는 것도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도시의 아카이브로서 FM’이다. 대구는 이미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음악사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각종 공연·축제는 매년 새로운 콘텐츠를 쏟아내고 있다. 이 모든 것을 FM채널에서 생중계하고, 다시 디지털 아카이브로 축적한다면, 10년 뒤 이 도시는 엄청난 음성·음악 기록유산을 갖게 된다. 이건 단지 방송이 아니라, 박물관적 기능까지 겸하는 ‘디지로그’ 플랫폼이다.
물론 이런 제안은, 선거철에 잠깐 올라왔다가 사라지는 공약 리스트를 한 줄 꿰차는 것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문화도시 대구”라는 이름은 아이디어보다도 일관성과 지속가능성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단발성 정치적 캠페인이 아니라, 더 앞을 봐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무식한 지론’ 말고, 데이터와 경험, 디지털 환경을 감안한 현실적인 설계도, 숫자로 설명되지 않는 그리움과 자존심, 그리고 도시의 결 같은 것까지 함께 품을 수 있는 상상력에다 공론화하는 것이다. ‘한국FM’의 흔적이 사라진 자리,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라는 새 이름이 올라앉은 이 도시에서, ‘대구스러운’ 100% 자체편성 음악FM 하나쯤은 이제 다시 꿈꿔봐도 되지 않을까. 언젠가 대구의 어느 골목 카페에서, 한 중년 청취자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 한국FM이 우리를 키웠고, 지금 이 FM이 우리 아이들을 키운다.” 1980년의 단절을 2026년의 연결로 바꾸는 일, 그 시작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래, 한번 제대로 해보자”라고, 누군가 먼저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 지금이 딱, 그 말을 꺼낼 타이밍이다.




